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뜯고 메우고 반복… 바보 같지만 그것이 인생 1 91세 ‘1세대 단색화 거장’ 정상화 ‘무한한 숨결’展 허윤희 기자 정상화 화백이 작품 ‘무제 84-3-8’(1984) 앞에 앉아있다. 멀리서 보면 흰색 벽지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실핏줄 같은 격자무늬 사이에서 다층적인 빛깔이 우러나온다. 한 일본 평론가가 “정상화의 흰색은 무지개”라고 평한 이유다. /갤러리현대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다산과 추사, 누가 뭐라 해도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귀양 살며 얼마나 전심치지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했었던가를 증언해주는 제자 황상이 있었다. 황상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이 학문 연구할 때의 일화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 선생님은 얼마나 오랫동안 방바닥에 앉아 공부만 했기 때문에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려 큰 고통을 겪었다”라고 말했다.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는 사자성어가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의자를 사용하지 않던 시절, 바닥에 발을 밀착해 앉아 있노라면 복숭아뼈가 닳아져, 구멍이 뚫릴 정도로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증언이었다. 추사의 평생 친구는 이재 권돈인이었다. 추사문집을 읽다 보면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수십 통이 있다. 어떤 편지에 “내 글씨에 대해서야 별로 이야기할 것은 없지만, 다만 기억해주실 일은 있네. 내가 붓글씨를 쓰려고 벼루에 먹을 가느라 10개 정도의 벼루가 가운데가 뚫렸고 모지랑이 붓이 다 닳아 털이 없어진 붓이 1000개는 되었네”라고 말해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라는 유명한 글귀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재라는 사실만으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누가 ‘골짜기 세대’라고 했어…김은중의 아이들, 쾌속 4강 중앙일보,박린 기자 (사진)최석현이 U-20 월드컵 나이지리아와의 8강전 연장 전반 5분 결승골을 터뜨린 뒤 포효하고 있다. 한국이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대회에서 무패 행진(3승2무)으로 4강에 진출했다. 한국은 5일 아르헨티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8강전에서 연장전 끝에 최석현(단국대)의 결승골로 나이지리아에 1-0으로 승리했다. 2년 주기인 이 대회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021년 인도네시아 대회가 취소돼 4년 만에 열렸다. 한국은 직전인 2019년 폴란드 대회에 이어 2회 연속으로 4강에 올랐다. 한국이 FIFA 주관 대회에서 2회 연속 4강에 오른 건 처음이다. 2003~2004년생이 주축인 이번 U-20 대표팀을 ‘골짜기 세대’ ‘낀 세대’로 불렀다. 아래로 푹 파이고 사이에 끼여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 가운데 이뤄낸 4강 진출이다 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은중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결국 눈물을 보였다. 왼쪽 눈 시력 잃은 김은중, 지도자로 우뚝 김 감독은 중학 시절 공에 맞아 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김종영의 유산 김종영 '삼일독립선언기념탑'. 원작은 1963년에 제작됐으나, 훼손돼 버려졌다가 제자들이 복원해 서대문 공원에 다시 세웠다. /김종영미술관 김종영은 사실 공공조각을 두 번 제작한 적이 있었다. 1963년 국민 성금으로 만든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이 그중 하나다. 그러나 파고다 공원에 세워졌던 그의 대형 조각은 1979년 군사정권 때 석연치 않은 이유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 삼청공원에 버려졌다. 민주화 물결이 거세질 때라, 사람들을 선동하는 듯한 기념상의 자세가 문제가 됐다는 설이 있다. 이 상은 김종영이 죽을 때까지 버려진 채 남았다가, 그의 제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1991년에야 서대문 독립공원에 다시 세워졌다. 그의 아름다운 생가도 수난을 겪었다. 1994년 본채와 별채인 사미루(四美樓) 사이에 길이 나서 한옥 일부가 훼철됐고, 일대 한옥마을은 두 동강이 났다. 무도(無道)한 일이다. 김종영을 가까이에서 본 이들만은 그가 추구한 ‘무한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제자들 중 최종태·최의순·송영수·김세중·최만린·엄태정 등이 나와 새로운 한국 조각의 시대를 열었다. 모두 엄청난 내공의 조각가들이다. 김종영의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평범했지만 모두가 존경한 삶 생전의 조각가 김종영. /김종영미술관 평생 이렇게 심오한 생각에 사로잡힌 채 김종영은 어떻게 살았을까? 의외로 그의 생활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는 해방 후 1948년부터 1980년까지 평생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지냈다. 오로지 학교와 집을 왕래한 것이 그의 생활 반경의 전부였다. 집에는 제대로 된 아틀리에도 없었기에 그는 주로 마당에서 작업했다. 동네 사람에게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해서, 그의 집은 삼선교 부근 언덕 꼭대기 인적이 드문 달동네에 있었다. 그의 아내는 “사또 할아버지에게 업어 키워진 귀한 손자”가 달동네에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김종영을 마음 깊이 존경했다. 학교에서도 그는 매우 평범한 생활을 했다. 학생들에게 미술해부학을 가르쳤고 조소 지도를 했지만, 대체로 말수가 적었고, 말을 해도 어눌한 편이었다. 한마디씩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나 격언을 던지듯이 했을 뿐이다. 작품 발표도 거의 한 적이 없었기에, 김종영이 평소 무엇을 만드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미대 건물 복도 끝 김종영의 방에서는 매일 일정한 속도로 망치 소리가 들렸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중앙SUNDAY 뉴스 스포츠 오디세이 37세 ‘킬러’는 살아있다, 잡초서 화초로 축구인생 터닝슛 정영재 기자 [스포츠 오디세이] 시련 딛고 태극마크 다시 단 박은선 #“온실 화초처럼 보호하다 월드컵 동행” 37세 늦은 나이에 대표팀에 다시 뽑혀 월드컵 출전이 유력한 박은선의 담대한 각오를 앵글에 담았다. 왼쪽 팔의 문신은 자신의 띠 동물인 호랑이. 오른쪽에는 십자가 문양을 새겼다. 콜린 벨(잉글랜드)은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다. 벨 감독은 박은선을 콕 집어 ‘월드컵에 데려 가겠다’고 못 박은 것이다. 지난 18일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에서 만난 박은선은 ‘온실 속 화초’라는 표현이 어색한 듯 웃었다. 하기야 온실은커녕 폭풍의 골짜기에서, 화초는커녕 끈질긴 잡초로 살아온 박은선 아닌가. #“괴물이 나타났어. 미아 햄 넘을 거야” 2003년 여름, 이의수 당시 한국여자축구연맹 회장이 나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위례상고(현 서울동산고) 2학년이었던 박은선은 1m80㎝ 키에 남자 못지않은 스피드와 파워가 있어서 실업 선배들도 쩔쩔 매는 골잡이라고 했다. 박은선은 그해 2003 미국 여자월드컵에 출전했다. 한국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이번에는 1977년으로 넘어가 볼까요? 〈작품4〉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했으며, 당시 미국 미술계 주류였던 추상표현주의 미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최욱경(1940~1985) 화가의 '환희'입니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최욱경은 미국 라스웰 재단의 입주 작가로 선정돼 뉴멕시코주에서 머무르며 작업했어요. 훗날 그녀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나의 24시간이 내가 바랐던 분위기 그 자체"였다고 말했지요. '환희'는 밝은 노랑 바탕색 위에 경쾌하게 움직이는 듯한 운동감 있는 형태들이 배치된 그림입니다. 노랑과 파랑이 곳곳에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빨강과 오렌지색이 틈틈이 에너지를 뿜어내는 듯해요. 원색은 아련한 추억의 색이라기보다는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고 싶은 미술가의 충동 같은 색이에요. 더욱이 이 그림은 가로가 무려 4.5m 넘는 큰 규모로 제작돼, 작가의 거리낌 없는 창조적 에너지를 감상할 수 있답니다. 네 작품에서 보았듯, 재치 있는 표정, 애틋하고 푸근한 정서, 창작열을 불태운 열정과 에너지 등이 우리 한국인의 피에 면면히 흐르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감수성이 오늘날 'K문화'에서(출처:사진,글,조선일보)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추상의 이해 1964년작 ‘자각상’. 김종영이 49세에 제작한 자각상으로, 눈을 감은 채 내면에 깊이 몰입한 자신의 모습을 나무에 담았다. /김종영미술관 이러한 환경에서 김종영이 보고 느꼈을 문제의식을 상상해 보라. 그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우리 전통 사상의 높은 가치를 누구보다 잘 체득한 인물이다. 그 가치는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지만, 무한히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가깝게 말하면 사랑이나 의리와 같은 무형의 가치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와 자연의 질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같은 것이다. 흔히 도교사상에서는 ‘도(道)’라고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높은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지녔음에도 조선은 서양의 과학적, 이성적 사고가 부족해 나라가 망하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그러니 김종영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무한한 가치를 추구하는 동양의 사상에 뿌리를 두되, 서양의 과학적 사고를 종합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인 언어를 찾을 길은 없을까? 1955년 마흔이 된 김종영은 이런 메모를 남겼다.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나 통할 수 있는 보편성과 어느 시대이고 생명을 잃지 않는 영원성을 가진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창작열 불태운 두 여성 화가, 박래현과 최욱경 〈작품3〉은 1956년 어느 이른 아침 시장 거리의 모습입니다. 여인들이 과일, 닭, 달걀 꾸러미, 말린 생선 등을 머리에 이고 또 손에 들고 분주하게 걷고 있어요.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식구들 먹을 것을 사서 오는 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이들도 있어요. 어머니 등에 업힌 아이는 잠이 들었지만, 형으로 보이는 소년 하나는 어머니 팔에 붙들려 억지로 끌려가고 있네요. 이 소년은 아침 일찍 너무 졸려서 어머니를 따라 나서기 싫은 걸까요, 아니면 시장을 지나치다가 뭔가 재미난 구경거리를 발견해서 더 보고 싶은 걸까요? 모두 앞을 보고 바지런히 가는데, 오직 이 소년의 시선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어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그림을 그린 박래현(1920~1976)은 김기창과 함께 부부 화가예요.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촉망받는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박래현이 화가로서 작업에만 몰두하기 쉽지 않게 만들었어요. 청력 장애가 있는 남편을 도와가며, 네 아이의 엄마로서, 화가로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해야 했으니까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고길동입니다. 이제 다들 제 역할을 이해한다면서요? 제가 악역이 아니라 진정한 성인이었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껄껄.” 26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을 찾은 한 관람객이 영화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의 광고 화면을 휴대폰으로 찍고 있다. 광고 속 캐릭터는 (왼쪽부터) 고길동·도우너·둘리·또치·마이콜. 영화는 지난 24일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 전작에 이어 27년 만에 재개봉했다. /이태경 기자 26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을 찾은 한 관람객이 영화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의 광고 화면을 휴대폰으로 찍고 있다. 광고 속 캐릭터는 (왼쪽부터) 고길동·도우너·둘리·또치·마이콜. 영화는 지난 24일 ‘둘리’ 탄생 40주년을 맞아 전작에 이어 27년 만에 재개봉했다. /이태경 기자 올해로 탄생 40주년을 맞은 ‘아기 공룡 둘리’의 애니메이션 배급사는 최근 ‘고길동의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는 극 중에서 말썽 부리는 둘리와 친구들을 거둬 키워준 고길동의 시점으로 작성됐다. 40년 전 아기 공룡 둘리가 처음 방영됐을 때 고길동은 악역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둘리와 함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