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인성학교 졸업증서(1927.3) 인성학교는 1년 넘게 휴교하였다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남녀 아동을 합쳐 6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성학교가 개교하기만을 기다려온 것이다. 교사는 이경채를 비롯하여 선우혁 교장, 안창손(安昶孫)과 중국인 등 4명뿐이었다. 생활비는 매월 7, 8원 정도였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만큼은 뜨거웠다. 이경채는 교재 편찬에 매달렸고, 선우혁·안창손 등과 매일 밤늦도록 다음날 교재를 토의하는가 하면 한글 신 철자법(당시 미 보급)을 만들어 학부모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성학교 제19회 졸업식을 맞아 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선우혁이 중국 및 서양인들로부터 동냥하시다시피 하면서 인성학교의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상황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상해 한인 사회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일본총영사관의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인성학교는 힘을 잃어 1935년 폐교되고 말았다. 결국 이경채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상해 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이경채가 상해로 망명한 시기는 윤봉길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을 폭살한 다음해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미 그곳을 떠나 절강성 항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경채는 비록 임시정부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1933년 6월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경 상해지역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초창기에는 사립이었지만 이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공립으로 전환되었고 그 산하단체인 상해교민단에서 운영하였다. 인성학교는 완전한 시민육성과 신민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글·한국사·한국지리 등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자활 능력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경채가 도착했을 당시의 인성학교는 윤봉길의거로 인해 프랑스 조계 공훈국(公薰局)의 한인 집회 금지로 강제 휴교된 상태였다. 선우혁(鮮于爀) 교장은 상해에 남아 다시금 학교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우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물로 어느 누구보다도 인성학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경채는 김판수(金判守)로 개명하고 선우혁을 도와 1933년 9월 다시금 학교 문을 열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학우회도 해체되면서 한국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재일본 한인 유학생운동은 각 학교별 한인 유학생동창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1월에 일본 내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이봉창이 일왕 히로이토(裕仁)가 관병식장(觀兵式場)에서 사쿠라다몽(櫻田門) 밖의 경시청 청사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제의 상징이며 최고 통수권자인 왕을, 경비선을 뚫고 저격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중국 신문에서는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했다며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봉창은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8일 순국했지만, 이경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사건 이후 일본인 유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도 이경채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곤 했다. 이봉창 의거를 통해 이경채는 이전의 사회주의 방식에서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이경채는 도쿄 경시청 내선과(內鮮科)에 피체되었다. 포악하기로 이름난 야나세(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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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이경채는 193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검정고시를 거쳐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야간) 법률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출옥 후 광주고보에 재입학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그리고 일제 경찰로부터 늘 감시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서 일본 유학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와세다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가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사건 규명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규탄하는 등 이에 적극 호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와세다대학은 자유분방하고 특권 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었고 사회주의자들의 요람 같은 곳이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학풍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세다대학을 선호하였다. 이경채는 낮에는 신문배달과 지하철 공사장 인부로 일하며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는 주경야독하면서도 바쁜 시간을 쪼개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활동하던 양태성(梁泰成)·윤창하(尹敞夏)와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펴고 있던 유동후(柳東厚)·문두재(文斗載) 등과 자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노선을 토의하곤 하였다. 양태성은 이경채와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동맹휴학은 1928년 9월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에 불복, 타협하여 학교 측의 최후 통첩일에 자제들을 등교시키면서 종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경채의 퇴학 처분으로 일어난 동맹휴학은 학생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으로 이어져 “교우회 자치,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노예교육에 항쟁, 독서의 자유 획득, 학원 내 경찰 투입과 간섭 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들이 살포되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명백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으로 폭발하였다. 한편, 이경채 등은 무려 50여 일 동안 예심 중에 있다가 1928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강해석·한길상·지창수·조칠성·박승남 등은 면소되었지만, 이경채·박병하·윤해병은 기소되었다. 이경채는 그해 10월 열린 광주지방법원 공판에서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1년 6월, 박병하는 징역 1년, 윤해병은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이경채는 개성소년형무소에 투옥되어 1929년 10월 20일 출옥하였다. 이경채가 출옥한 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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