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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는 교재 편찬에 매달렸고, 선우혁·안창손 등과 매일 밤늦도록 다음날 교재를 토의하는가 하면

한글 신 철자법(당시 미 보급)을 만들어 학부모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인성학교 졸업증서(1927.3)

인성학교는 1년 넘게 휴교하였다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남녀 아동을 합쳐 6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성학교가 개교하기만을 기다려온 것이다.

교사는 이경채를 비롯하여 선우혁 교장, 안창손(安昶孫)과 중국인 등 4명뿐이었다.

생활비는 매월 7, 8원 정도였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만큼은 뜨거웠다. 이경채는 교재 편찬에 매달렸고, 선우혁·안창손 등과 매일 밤늦도록 다음날 교재를 토의하는가 하면 한글 신 철자법(당시 미 보급)을 만들어 학부모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성학교 제19회 졸업식을 맞아 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선우혁이 중국 및 서양인들로부터 동냥하시다시피 하면서 인성학교의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상황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상해 한인 사회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일본총영사관의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인성학교는 힘을 잃어 1935년 폐교되고 말았다. 결국 이경채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