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9 (금)

  • 맑음동두천 -0.4℃
  • 맑음강릉 1.4℃
  • 맑음서울 1.3℃
  • 맑음대전 1.1℃
  • 맑음대구 4.3℃
  • 맑음울산 4.0℃
  • 맑음광주 2.5℃
  • 맑음부산 5.6℃
  • 맑음고창 -0.4℃
  • 구름많음제주 6.3℃
  • 맑음강화 1.4℃
  • 맑음보은 -0.3℃
  • 맑음금산 0.2℃
  • 맑음강진군 3.5℃
  • 맑음경주시 4.0℃
  • 맑음거제 4.8℃
기상청 제공

전체메뉴

닫기

이경채는 개성소년형무소에 투옥되어 1929년 10월 20일 출옥하였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동맹휴학은 1928년 9월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에 불복, 타협하여 학교 측의 최후 통첩일에 자제들을 등교시키면서 종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경채의 퇴학 처분으로 일어난 동맹휴학은 학생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으로 이어져 “교우회 자치,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노예교육에 항쟁, 독서의 자유 획득, 학원 내 경찰 투입과 간섭 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들이 살포되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명백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으로 폭발하였다.

 

한편, 이경채 등은 무려 50여 일 동안 예심 중에 있다가 1928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강해석·한길상·지창수·조칠성·박승남 등은 면소되었지만, 이경채·박병하·윤해병은 기소되었다. 이경채는 그해 10월 열린 광주지방법원 공판에서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1년 6월, 박병하는 징역 1년, 윤해병은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이경채는 개성소년형무소에 투옥되어 1929년 10월 20일 출옥하였다.

 

이경채가 출옥한 지 10여일 후에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직접 학생 시위에는 참여치 못하였으나 비밀회의에 참석하여 사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관련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상황에서 이경채도 그해 11월 말 광주경찰서에 피체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행동에 많은 제한을 받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