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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는 김판수(金判守)로 개명하고 선우혁을 도와 1933년 9월 다시금 학교 문을 열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와중에 여러 번 이름을 바꿨는데 이때가 처음이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상해 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이경채가 상해로 망명한 시기는 윤봉길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을 폭살한 다음해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미 그곳을 떠나 절강성 항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경채는 비록 임시정부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1933년 6월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경 상해지역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초창기에는 사립이었지만 이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공립으로 전환되었고 그 산하단체인 상해교민단에서 운영하였다. 인성학교는 완전한 시민육성과 신민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글·한국사·한국지리 등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자활 능력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경채가 도착했을 당시의 인성학교는 윤봉길의거로 인해 프랑스 조계 공훈국(公薰局)의 한인 집회 금지로 강제 휴교된 상태였다. 선우혁(鮮于爀) 교장은 상해에 남아 다시금 학교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우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물로 어느 누구보다도 인성학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경채는 김판수(金判守)로 개명하고 선우혁을 도와 1933년 9월 다시금 학교 문을 열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는 와중에 여러 번 이름을 바꿨는데 이때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