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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는 도쿄 경시청 내선과(內鮮科)에 피체되었다.

포악하기로 이름난 야나세(柳瀨) 경부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학우회도 해체되면서 한국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재일본 한인 유학생운동은 각 학교별 한인 유학생동창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1월에 일본 내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이봉창이 일왕 히로이토(裕仁)가 관병식장(觀兵式場)에서 사쿠라다몽(櫻田門) 밖의 경시청 청사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제의 상징이며 최고 통수권자인 왕을, 경비선을 뚫고 저격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중국 신문에서는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했다며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봉창은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8일 순국했지만, 이경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사건 이후 일본인 유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도 이경채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곤 했다. 이봉창 의거를 통해 이경채는 이전의 사회주의 방식에서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이경채는 도쿄 경시청 내선과(內鮮科)에 피체되었다. 포악하기로 이름난 야나세(柳瀨) 경부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경채가 이를 견뎌냈고 일제 경찰들은 임시정부와 내통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제 경찰은 그를 풀어주기는커녕 다른 경찰서로 이송시켜 구류하는 소위 ‘다라이 마와시(たらい回し)’, 조리돌리기를 시켰다. 일제 경찰은 이경채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고 석방을 계속해서 미룬 것이다. 이경채는 이런 생활을 6개월이나 한 뒤에야 풀려났다.

 

이경채는 일본에서의 신변 위험 및 유학생들 간 좌우 대립이 심해지자 와세다대학 전문부 2학년을 포기하고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광주고보도 졸업을 몇 개월 남겨두고 피체되어 학교를 끝마치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경채는 처음에는 나가사키항을 통해 상해로 밀항하고자 했으나 감시가 너무 심해 고베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행스럽게 일본 상선의 고급선원 오가와의 도움을 받아 침대 밑에 숨어 무사히 상해로 망명했다. 때는 1933년 4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