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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의 학창시절 및 중국군 장교 복무 당시 유품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이경채는 193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검정고시를 거쳐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야간) 법률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출옥 후 광주고보에 재입학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그리고 일제 경찰로부터 늘 감시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서 일본 유학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와세다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가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사건 규명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규탄하는 등 이에 적극 호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와세다대학은 자유분방하고 특권 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었고 사회주의자들의 요람 같은 곳이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학풍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세다대학을 선호하였다.

 

이경채는 낮에는 신문배달과 지하철 공사장 인부로 일하며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는 주경야독하면서도 바쁜 시간을 쪼개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활동하던 양태성(梁泰成)·윤창하(尹敞夏)와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펴고 있던 유동후(柳東厚)·문두재(文斗載) 등과 자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노선을 토의하곤 하였다.

 

양태성은 이경채와 독서회 활동을 같이하기도 했는데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여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윤창하는 1928년 6월, 이경채의 퇴학 처분에 맞서 일으킨 광주고보 맹휴에 참가, 활동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기소유예로 풀려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