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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한 두 명의 호림부대원 중 유일하게 북파 경력이 있는 송이남(가명)옹은 “정부 보상 등 대가를 바라며 인터뷰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원치 않는다”

참으로 애국자이시다. 요즈음은 없는 공도 만들고 사고도 국가한테 돈 달라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부끄러운 줄들 알아야 합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남침 막으려 첫 북파한 부대원, 240명 중 23명만 생환했다3
생존한 두 명의 호림부대원 중 유일하게 북파 경력이 있는 송이남(가명)옹은 “정부 보상 등 대가를 바라며 인터뷰하는 것처럼 비치는 건 원치 않는다”며 정면 사진 촬영을 꺼렸다. 최영재 기자

5대대와 6대대에서 북한군에 생포된 호림부대원은 인민재판을 받았고, 김일성이 참관한 가운데 처형됐다고 한다. 1949년 9월 11일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인민재판 과정은 1990년과 2000년 국내에서 방송된 적이 있다. 이 자료에는 북한 측 검사가 “호림부대는 남한의 채병덕 참모총장 등 육군 수뇌부가 직접 조직한 특수부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송옹은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호림부대의 실체를 부인했다”며 “한국전쟁이 남침이 아니고 북침이라는 주장의 빌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9연대인가, 용산에 우리 연대(당시 용산 주둔 부대는 17연대)가 있었는데 북에서 철수한 뒤 어느 날 우리를 줄 세우더라고요.”

 송옹은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뒤인 1950년 8월에 입대했다. 송옹은 “(원산 인근의) 이원은 상륙하기 아주 좋은 해안”이라며 “우리(미 7사단)는 (함경북도) 풍산·삼수·갑산을 지나 혜산진까지 진격했는데 나는 삼수까지만 갔고, 이후 중공군에 밀려 흥남에서 철수하면서 장진호를 서쪽에서 호위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한국군 소속으로 미군에 파견된 상태였다. 소속이 중간에 바뀌긴 했지만, 송옹은 북파 특수공작 뿐 아니라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북진, 장진호전투 등 6·25의 주요 고비마다 현장에 있었다. 그의 행적이 곧 6·25 전사(戰史)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