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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대원들, 김일성 참관 속 처형돼,남침 막으려 첫 북파한 부대원, 240명 중 23명만 생환했다2

호림부대의 실체를 알리려는 호림안보협의회의 정규필 회장(예비역 대령)은 “대통령령 37호로 만들어진 부대였음에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실체를 부인했다”고 밝혔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남침 막으려 첫 북파한 부대원, 240명 중 23명만 생환했다2
붙잡힌 대원들, 김일성 참관 속 처형돼

호림부대는 1949년 7~8월 38선 이북에서 임무를 수행한 뒤 9월부터 지리산·보현산·팔공산 등에서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했다.

호림부대의 실체를 알리려는 호림안보협의회의 정규필 회장(예비역 대령)은 “대통령령 37호로 만들어진 부대였음에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실체를 부인했다”고 밝혔다. 송옹이 밝힌 실체 부인의 과정은 이렇다. 호림부대는 2, 3, 5, 6대대로 이뤄졌다. 1949년 6월 29일, 5대대와 6대대 240명이 먼저 북으로 올라갔다. 5대대와 6대대는 북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소련 군사 장비를 실어나르는 원산~양덕 간 철로의 터널과 교량을 폭파하는 게 주요 임무였다. 

하지만 작전의 결과는 처참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북한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만 것이다. 호림안보협의회에 따르면, 240명 중 203명이 전사했고, 14명이 포로로 잡혔다. 생환자는 23명에 불과했다. 북한은 생포 호림부대원이 44명이라고 밝혔다. 5대대, 6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3대대는 철수 명령을 받고 7월 14일 서울 용산 기지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