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광주광역시 서구(구청장 김이강)가 경제활동 및 주민생활 중 불편을 초래하는 규제를 발굴·개선하기 위해 '2023 규제개혁 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해 우수작 6건을 최종 선정했다. 서구는 지난 3월 주민과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진행한 결과 아이디어 166건이 접수됐으며, 실무부서 심사를 거쳐 12일 규제개혁위원회에서 최종 심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최우수상에는 서구 아동청소년과 김영주 팀장의 '자립준비청년 자립수당 신청방법 완화' 아이디어가 선정됐다. 김 팀장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의 경제적 부담 완화와 사회의 안정적 정착을 위해 최대 60개월 동안 지원하는 자립수당이 현재는 주민등록 주소지에서만 신청하도록 해 대상자들이 신청접수조차 못 하는 등 여러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며 "전국 어디에서나 신청이 가능하도록 배려해 자립준비청년들의 안정적인 사회 정착에 도움을 주자"고 제안했다. 우수상에는 서구 감사담당관실 오미정 주무관의 '시·청각 중복 장애인 장애유형 등록', 건강증진과 조미영 팀장의 '초·중·고교생 자녀 교육비 세액공제 확대 적용' 아이디어가 선정됐다. 오 주무관은 "시·청각 중복 장애인의 경우 장애 유형에 포함되지 않아 맞춤형 복지서비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항일전쟁에 참가 10.중국 국민당 중앙군 활동 당시 상해로 돌아온 이경채는 중국 노 혁명가인 장고산(張孤山)의 소개로 1935년 10월 일본연구소에 들어갔다. 일본연구소는 겉으로는 민간 연구소였으나 실제는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직할로 장백리(蔣百里)가 주관하였다. 장백리는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일사관학교를 거친 군사학 이론가로서, 장개석의 군사고문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 육군대학 초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때 장백리가 이경채의 이름을 이일휘(李一輝)로 고쳐 주었다. 항일전에 한 번 이름을 크게 빛내라는 뜻에서였다. 이후 이경채는 임시정부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임시정부는 그 후에도 일본군을 피해 가흥·진강·장사·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중경에 본거지를 마련할 때까지 유랑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경채는 숙명적으로 적대국인 일본과 싸워야 하는 중국 국민당과 함께하는 것이 한국 독립의 첩경이 될 것이라 여겼다. 일본연구소는 일본·미국·영국·프랑스 유학생 12명(일본사관 출신 2명), 민간학자 6명, 기타 4명 등 모두 22명으로 구성되었고, 정치·경제·군사·사회 등 분야도 광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 창간호(1934.1월) 이경채는 1년여 동안의 인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항주로 옮겨갔다. 이때 이중환(李中煥)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14년 동안 머물던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박찬익(朴贊翊)·엄항섭(嚴恒燮) 등은 가흥으로, 김철·조소앙·송병조·김철승은 항주로 피신해 임시정부 판공처를 개설했으며, 김두봉 등은 남경으로 피신하였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안창호는 프랑스 경찰에 피체되었다가 일본 경찰에 넘겨졌다. 항주에 모인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재건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경채는 전남 함평 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원비서장 김철(金澈)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震光)≫ 간행에 간여하게 되었다. 이경채는 이창세(李昌世)와 함께 중국인쇄소에서 조판, 인쇄를 담당하였다. 이경채가 개성형무소 복역 당시 문선(文選) 조판 교정 기술을 습득하였던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진광≫은 4·6배판 활판본으로 격월간 발행되었는데 부수는 국문본이
부산 영도구(구청장 김기재)는 지난 5월 17일 영도 마리노 오토캠핑장에서 '2023년 어울림 복지한마당' 행사를 개최했다. 영도구와 영도구사회복지사협회(협회장 서미라), 영도구 지역사회보장협의체(민간위원장 김덕신)가 함께 주최한 이번 행사는 제1부 개회행사, 사회복지유공자 표창과 제2부 마리노 썬셋 감성콘서트의 순서로 진행됐다. 특히 2부 콘서트는 부산항의 야경을 배경으로 한 이색적인 캠핑장에서 푸드 트럭에서 제공하는 먹거리를 즐기며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준비해, 관내 30여 개 350여 명의 복지기관 종사자와 사회복지부서 직원들에게 휴식과 격려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날 김기재 영도구청장은 수상자를 비롯한 사회복지 종사자의 헌신과 노고를 격려하고 앞으로의 처우개선과 권리향상에 힘쓸 것을 밝히는 한편, 향후에도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소외된 이웃들을 적극적으로 살펴봐 줄 것을 당부했다. 출처 : 부산영도구청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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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인성학교 졸업증서(1927.3) 인성학교는 1년 넘게 휴교하였다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남녀 아동을 합쳐 6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성학교가 개교하기만을 기다려온 것이다. 교사는 이경채를 비롯하여 선우혁 교장, 안창손(安昶孫)과 중국인 등 4명뿐이었다. 생활비는 매월 7, 8원 정도였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만큼은 뜨거웠다. 이경채는 교재 편찬에 매달렸고, 선우혁·안창손 등과 매일 밤늦도록 다음날 교재를 토의하는가 하면 한글 신 철자법(당시 미 보급)을 만들어 학부모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성학교 제19회 졸업식을 맞아 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선우혁이 중국 및 서양인들로부터 동냥하시다시피 하면서 인성학교의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상황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이 상해 한인 사회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일본총영사관의 간섭과 통제가 강화되면서 인성학교는 힘을 잃어 1935년 폐교되고 말았다. 결국 이경채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상해 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이경채가 상해로 망명한 시기는 윤봉길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을 폭살한 다음해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미 그곳을 떠나 절강성 항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경채는 비록 임시정부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1933년 6월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경 상해지역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초창기에는 사립이었지만 이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공립으로 전환되었고 그 산하단체인 상해교민단에서 운영하였다. 인성학교는 완전한 시민육성과 신민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글·한국사·한국지리 등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자활 능력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경채가 도착했을 당시의 인성학교는 윤봉길의거로 인해 프랑스 조계 공훈국(公薰局)의 한인 집회 금지로 강제 휴교된 상태였다. 선우혁(鮮于爀) 교장은 상해에 남아 다시금 학교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우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물로 어느 누구보다도 인성학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경채는 김판수(金判守)로 개명하고 선우혁을 도와 1933년 9월 다시금 학교 문을 열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학우회도 해체되면서 한국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재일본 한인 유학생운동은 각 학교별 한인 유학생동창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1월에 일본 내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이봉창이 일왕 히로이토(裕仁)가 관병식장(觀兵式場)에서 사쿠라다몽(櫻田門) 밖의 경시청 청사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제의 상징이며 최고 통수권자인 왕을, 경비선을 뚫고 저격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중국 신문에서는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했다며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봉창은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8일 순국했지만, 이경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사건 이후 일본인 유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도 이경채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곤 했다. 이봉창 의거를 통해 이경채는 이전의 사회주의 방식에서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이경채는 도쿄 경시청 내선과(內鮮科)에 피체되었다. 포악하기로 이름난 야나세(柳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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