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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항일전쟁에 참가

이경채는 일어가 능숙하다하여 문구를 교정․교열하거나 자료를 분류,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항일전쟁에 참가

10.중국 국민당 중앙군 활동 당시

상해로 돌아온 이경채는 중국 노 혁명가인 장고산(張孤山)의 소개로 1935년 10월 일본연구소에 들어갔다.

일본연구소는 겉으로는 민간 연구소였으나 실제는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직할로 장백리(蔣百里)가 주관하였다. 장백리는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일사관학교를 거친 군사학 이론가로서, 장개석의 군사고문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 육군대학 초대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때 장백리가 이경채의 이름을 이일휘(李一輝)로 고쳐 주었다. 항일전에 한 번 이름을 크게 빛내라는 뜻에서였다.

 

이후 이경채는 임시정부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임시정부는 그 후에도 일본군을 피해 가흥·진강·장사·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중경에 본거지를 마련할 때까지 유랑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경채는 숙명적으로 적대국인 일본과 싸워야 하는 중국 국민당과 함께하는 것이 한국 독립의 첩경이 될 것이라 여겼다.

 

일본연구소는 일본·미국·영국·프랑스 유학생 12명(일본사관 출신 2명), 민간학자 6명, 기타 4명 등 모두 22명으로 구성되었고, 정치·경제·군사·사회 등 분야도 광범위했다. 이경채는 일어가 능숙하다하여 문구를 교정․교열하거나 자료를 분류,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얼마 뒤 일본연구소가 전략적으로 해체되자 같이 근무하던 전직오(全職吳)와 더불어 중국 제3로군 초비(剿匪) 북로군 사령관 진성(陳誠) 장군 부대에 예속되었다. 진성은 국민당 정부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대만으로 건너간 뒤에는 국민당 부총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