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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는 이창세(李昌世)와 함께 중국인쇄소에서 조판, 인쇄를 담당하였다.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 창간호(1934.1월)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 창간호(1934.1월)

이경채는 1년여 동안의 인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하고 있던 항주로 옮겨갔다.

이때 이중환(李中煥)으로 다시 개명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14년 동안 머물던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박찬익(朴贊翊)·엄항섭(嚴恒燮) 등은 가흥으로, 김철·조소앙·송병조·김철승은 항주로 피신해 임시정부 판공처를 개설했으며, 김두봉 등은 남경으로 피신하였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안창호는 프랑스 경찰에 피체되었다가 일본 경찰에 넘겨졌다.

 

항주에 모인 임시정부 요인들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재건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경채는 전남 함평 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원비서장 김철(金澈)의 추천으로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震光)≫ 간행에 간여하게 되었다. 이경채는 이창세(李昌世)와 함께 중국인쇄소에서 조판, 인쇄를 담당하였다. 이경채가 개성형무소 복역 당시 문선(文選) 조판 교정 기술을 습득하였던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진광≫은 4·6배판 활판본으로 격월간 발행되었는데 부수는 국문본이 약 500부, 중국어본이 약 1,000부였다. 지면 쪽수는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20~50쪽 안팎이었다. 국문본은 구미교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정당성과 일제의 폭정을 선전하기 위해, 중국어본은 한국독립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야만적인 행위를 중국식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발행되었다. 발행 비용은 미주 대한인국민회 회원 김형순(金衡珣)의 재정적 지원과 중국 국민당 절강성 당부와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의 협찬으로 충당하였다.

 

송병조(宋秉祚, 1877~1942) 목사가 주관하고, 총 편집은 조소앙이 담당하였으며, 양기탁(梁起鐸)·김두봉(金枓奉)·김상일(金相一) 부처, 김사집(金思集), 박경수(朴敬洙) 부처, 이경채 등이 간여하였고 신익희(申翼熙) 등이 오갔다. 이때의 인연으로 신익희는 이경채가 결혼할 당시 주례를 섰다.

 

하지만 1935년 8월 항주의 일본영사관이 중국인 밀정을 통해 ≪진광≫ 기관지를 출판하던 비밀장소를 알아내자 중국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졌다. 1927년 4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내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국민당은 가급적이면 일본군과의 마찰을 꺼렸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으로부터의 재원 조달에 차질이 생겼다. 부득이하게 송병조 목사의 제의로 ≪진광≫ 발간을 잠시 중단하고 전원 임시 분산하되 훗날 다시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딱히 갈 곳을 찾지 못했던 이경채는 다시 1935년 8월 상해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