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진짜 무서운 건 원폭 이후의 사회” 그는 “진짜 무서운 건 원폭 이후의 사회였다”고 했다. “피폭자는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화상 입은 아이들하곤 친구들이 안 놀아줬어요. 부모들이 ‘피폭도 전염병처럼 옮는다’고 생각해서였죠.” 장훈은 프로야구 선수를 은퇴하고 60살 넘을 때까지도 피폭자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사람 타는 냄새’를 떠올리는 게 무서워, 피폭 기억이 날 것 같으면 배트를 휘둘렀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일본 방송을 보다가 젊은 친구들이 ‘원폭 떨어진 지점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분노했다. 2006년 8월 15일 일본 패전일에 일본의 한 방송에 출연해 “우리 세대는 전쟁을, 그리고 원폭 체험을 후대에 남겨놔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루에 한 끼는 물로 채웠던 시절, 장훈은 큰형인 세치씨 덕분에 오사카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야간 택시 기사로 월 3만3000엔을 벌면서 1만엔을 동생에게 매달 보냈다. 온 가족의 희망으로 오사카의 나니와상고 4번 타자로 섰다. 장훈은 “한국은 세상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77년 1월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장훈(오른쪽)이 어머니 박순분 여사와 함께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 장훈은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야구밖에 모르는 사고력을 넓혀, 모국의 프로야구 설립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 여사는 “아들이 뛰는 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조선일보 DB 1977년 1월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장훈(오른쪽)이 어머니 박순분 여사와 함께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 장훈은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야구밖에 모르는 사고력을 넓혀, 모국의 프로야구 설립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 여사는 “아들이 뛰는 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조선일보 DB 그날 그의 가족도 모두 살아남지는 못했다. 장훈은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6학년 누나가 그날 죽었다”고 했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큰누이는 수십 명과 함께 학교에서 쓰러졌고 어머니는 열기에 녹아 얼굴도 못 알아보는 아이들 틈새에서 명찰로 딸을 찾았습니다. 누이는 언제나 하얀 얼굴이어서 같이 길을 걸으면 남들이 ‘예쁘다’고 했었는데…. 그 얼굴이 짓물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장훈 “내 조국이니 말할수 있다...日에 사과하라, 돈내라 언제까지 할건가” 히로시마 생존 피폭자인 ‘일본 야구의 전설’ 장훈 인터뷰 도쿄=성호철 특파원 “무더운 여름 날씨였던 1945년 8월 6일,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저는 친구들과 밖에 놀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번쩍, 쿵’ 했습니다. 정신을 되찾았을 땐 어머니가 저를 꽉 껴안고 있었습니다. 유리 파편에 찔린 어머니의 치마저고리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10일 재일 동포 2세인 전직 프로야구 선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83)은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여러 차례 울먹였다. 여든이 넘어서도 78년 전 기억이 생생한 듯했다. 그는 “그날 피란해서 마을의 밭에 갔는데 심한 화상에 살이 탄 사람들 천지였다. 심한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장씨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23년 동안 안타 3085개, 홈런 504개를 친 스타 선수다.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지만 한국 국적자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폭에서 살아남은 피폭자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2020년 10월 27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평화의광장에서 열린 '제5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 행사' 참석자들이 6·25 전쟁 전사자 명비에 헌화하는 모습. /김지호 기자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장진호 철수, 한반도 적화(赤化) 막았다 12월 11일, 미 해병대 1사단은 마침내 함흥에 도착했습니다. 11월 27일부터 이날까지 보름 동안 장진호와 개마고원 일대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장진호 전투'라고 합니다. 이 전투만 놓고 본다면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진주만 공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는 평가가 나왔죠.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이것을 일방적인 승리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피해 규모는 중공군 쪽이 훨씬 컸습니다. 유엔군 사상자가 1만7000여 명인 데 비해 중공군 사상자는 공식적으로 4만8000여 명이고, 비공식 수치는 6만명이 넘습니다.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보름 동안 사투를 벌이는 동안 다른 부대가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까지 진출한 국군 부대도 함흥으로 퇴각했고요.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군인과 피란민 20만여 명은 흥남항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흥남 철수 작전'이라고 합니다.장진호 전투로 큰 피해를 당한 중공군 9병단이 전투 기능을 잃어 몇 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장진호 일대에 고립된 미 해병대 1사단은 궤멸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갈우리 활주로를 통해 동상 환자 등 부상병 4500명을 항공기로 후송했을 때, 미군 지휘부는 "장비를 모두 버리고 항공기로 철수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올리버 스미스(1893~1977) 사단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런 불명예는 없다"고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철수한다면 2개 대대 병력이 마지막 항공기 이륙까지 활주로에 남아야 하는데 그럴 순 없다는 뜻이었죠. 스미스 사단장은 110㎞나 떨어진 함흥까지 사단 병력 전체가 걸어서 이동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후퇴인가'라는 종군기자의 질문에 스미스는 "아니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험난한 지형과 추위를 뚫고 적과 전투를 벌여가며 부대 단위와 장비를 유지하고 후퇴한다는 것은 극한의 사투와 같았습니다. 이때 미 해병대가 죽을 힘을 다해 넘었던 고개가 진흥왕 순수비로 유명한 황초령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대규모 추가 병력을 투입하고 다리를 폭파하며 퇴로를 막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도 추위로 인해 적잖은 타격을 입었죠. 미군의 사격을 피해 눈 위에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혹한과 적군을 뚫고 110㎞ 강행군11월 27일,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됐습니다. 이곳 유엔군 병력은 최대 3만명으로, 중공군의 4분의 1 수준이었죠(자료에 따라 10분의 1까지 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미군에게 중공군 못지않은 큰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바로 추위입니다. 10월이면 눈이 내리는 해발 1000~2000m 개마고원은 중강진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입니다. 밤이면 영하 30도, 낮에도 영하 20도까지 내려가 윤활유와 대포가 얼어붙고 배터리가 방전돼 통신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중공군의 기습 공격에 전사자가 늘어났지만,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팔 수 없어 주검을 서너겹 쌓아 올려야 했습니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렇게 지독한 수준의 혹한기(몹시 추운 시기) 전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뉴스 속의 한국사] "후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한 것 장진호(長津湖) 전투 ▲장진호 전투 중 이동하는 미 해병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7일(현지 시각) 미 의회 연설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長津湖) 전투에서 중공군 12만명의 인해(人海)전술을 돌파하는 기적 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어요. '인해전술'이라는 것은 우수한 무기가 아니라 많은 병력을 투입해 적을 압도하려는 전술로, 6·25전쟁(1950~1953) 당시 중공군(중국 공산군)이 실제로 썼어요. 윤 대통령 발언에 중국 외교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중국의) 위대한 승리"라고 반발했습니다. '항미원조 전쟁'이란 '중국이 미국의 침략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왔다'는 뜻으로, 중국이 자국 입장에서 6·25전쟁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장진호 전투는 과연 어떤 전투였을까요? 개마고원으로 밀려든 중공군 12만명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북쪽이 남쪽을 침범함)으로 6·25전쟁이 시작됐어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지만,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해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10월 25일 중공군이 북
(싱가포르 2023년 5월 3일 PRNewswire=연합뉴스) 배우 한소희가 패션 브랜드 찰스앤키스(CHARLES & KEITH)의 새로운 글로벌 브랜드 앰버서더로 선정되었다. 브랜드의 공동 창립자 키스 웡(Keith Wong)은 "한소희는 진정한 개성과 자신감, 창의성을 바탕으로 찰스앤키스의 아이덴티티를 함께 구현하게 될 것입니다."라며 이어 "그녀가 찰스앤키스 패밀리에 합류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바라보게 되어 기쁘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새로운 앰버서더 한소희는 2023년 3분기에 공개될 가을 겨울 캠페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출처: CHARLES & KEITH [편집자 주] 본고는 자료 제공사에서 제공한 것으로, 연합뉴스는 내용에 대해 어떠한 편집도 하지 않았음을 밝혀 드립니다. (끝) 출처 : PRNewswire 보도자료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는 27일(현지 시각) 중남미 페루 남동부에 위치한 쿠스코에서 폐기물 통합관리사업 착수식을 개최했다고 28일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마추픽추와 잉카문명으로 유명한 쿠스코 지역에는 연간 약 300만 명의 해외여행자가 유입되며, 약 50만 명이 거주하는 페루의 대표 도시 중 하나이다. 하지만 페루는 우리나라처럼 폐기물에 대한 분리수거가 의무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쓰레기를 위생적으로 처리하고 재활용하기 어려운 실정으로, 발생하는 폐기물의 약 90% 이상이 땅 아래 매립된다. 코이카는 2027년까지 총 450만 불의 예산을 들여 하루 12t 규모의 음식물 쓰레기와 같은 유기성 폐기물을 퇴비화할 수 있는 시설을 건립하고, 시범지역을 중심으로 유기성 폐기물이 효율적으로 분리 배출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폐기물이 지속적으로 자원화되고 재사용될 수 있도록 쿠스코시의 순환 경제 정책 수립을 지원하여 궁극적으로 탄소발생량 감축에 기여할 예정이다. 27일 쿠스코 시청에서 개최된 착수식에는 루이스 벨트란(Luis Beltran Pantoja Calvo) 쿠스코시장, 김영우 코이카 페루사무소장, 이번 사업 수행기관인 환경전략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