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65년 한일(韓日)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 일부로 세운 ‘국민 기업’이라는 칭호도 퇴색했을 게 분명하다,
장교 시절 당번병을 쓰지
않았던 청암은 통행금지를 지키다가 첫 아이를 잃었다. 그는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입으로만 외치지 않고 국제 가격보다 20~40% 저렴하게 양질의 철강 제품을 국내기업들에 공급하면서 흑자 행진을 이어가는
‘제철보국(製鐵報國) 경영’에 목숨 걸었다.
그는 회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는 “우리가 실패하면 조상에게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 우향우(右向右)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하자”고 외쳤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때마다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갔다.
1979년 박정희 서거후 청암은 “포항제철을 정치 외풍에서 지키기 위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놨다.
1990년 3당 합당 후 민정계의 수장(首長·최고위원)이 된 그는 김영삼 대통령 후보와의 불화로 1992년 말 민자당 최고위원·포항제철 회장·국회의원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다른 추도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나 없이 돈에 홀려 정신 잃은 세상에서 박태준의 길을 따라가기란 너무 어렵고, 어쩌면 그 분은 이 시대에 마지막 애국자인지 모른다. (중략) 정직·청렴한 그 분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바르게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