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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슈바이처’ 강원희(姜元熙·89) 선교사가 26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강원희(姜元熙·89) 선교사가 26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세브란스병원이 27일 밝혔다.

1961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고인은 1970년 강원도 무의촌에 병원을 열었다. 그는 생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친이 황해도 피란민이었다. 의대 졸업할 때 꿈이 무의촌 봉사였다”고 했다. 병원도 잘 됐다.

하지만 그는 항상 은혜의 빚더미 위에 살고 있고, 조금이라도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976년 한경직 목사가 속초를 방문해 찾아갔다. 선교사로 가고 싶다고 하니 네팔을 권했다.

간호사 출신인 아내 최화순 권사가 ‘우리도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느냐’고 했다. 그는 ‘꼬리도 머리도 아닌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 네팔로 건너가 약 40년간 네팔·방글라데시·스리랑카 등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쳤다. 48세 늦은 나이로 해외 선교에 나섰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봉사에 헌신했다.

네팔은 공산당이 득세했고, 서점에는 김일성 책 천지였다. 현지 청년들은 “남한에서 왔다”는 그에게 “죽여버리겠다”며 으르렁댔다. 그는 매 주말 산동네를 찾아다니며 병자들을 고쳤다. 아이 출산부터 중환자 수술까지 거의 모든 환자를 돌봤다. 먼 곳에 갈 땐 하루 열대여섯 시간 걸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닥터 강이 치료하면 염증도 안 생기고 잘 낫는다”고들 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낮에는 환자들을 돌보고 밤에는 잘 시간을 쪼개가면서 현지 언어를 익혔다. 새로운 의술을 익히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귀국해 대형 병원에서 새로운 의료 기술을 익혔다. 봉사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2010년 가을 히말라야 끝자락 네팔의 한 마을에서 아이를 안은 주민과 이야기하고 있는 강원희 선교사(왼쪽)와 아내 최화순(가운데) 권사. /사진작가 고천윤(조선일보DB)
2010년 가을 히말라야 끝자락 네팔의 한 마을에서 아이를 안은 주민과 이야기하고 있는 강원희 선교사(왼쪽)와 아내 최화순(가운데) 권사. /사진작가 고천윤(조선일보DB)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1998년 힌두교 성지인 네팔 돌카의 산골짜기 병원에서 병원 사역자 중 한 사람이 간호사 방의 힌두신(神) 포스터를 찢어버렸다. 성난 군중이 병원으로 새까맣게 밀어닥쳤다. 먼저 기도를 하고, 죽을 각오로 그들을 맞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실수였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내가 책임지겠다’고 빌었다. 사람들은 몇 시간 만에 씩씩대며 돌아갔다. 그는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친구처럼 신뢰를 쌓은 덕에 살아남은 것 같다”고 했다(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