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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李商隱)은 선의 영향 아래에서 무상감과 인간고를 시화했다.

회창(會昌)의 폐불사건(癈佛事件, 845~847)을 거쳐 오대(五代, 907~959)에 들어서자 선종은 오가(五家)로 분파되면서 더욱 발전을 거듭했다. 이때는 선승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이 활동하던 시기다. 운문은 당(唐) 중기 이후 발전해 온 선과 시를 결합시킨 인물이다. 시작(詩作)에 능했던 그는 특히 선문답을 통하여 일자시(一字詩 : 一字關)라는 독특한 선시를 많이 남겼다. 이 무렵 선의 역사서이자 선문답집인 ≪조당집(祖堂集)≫과 ≪전등록(傳燈錄)≫이 간행되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이상은(李商隱)은 선의 영향 아래에서 무상감과 인간고를 시화했다. 사공도(司空圖, 837~908)는 주로 도피적인 산림(山林)의 정서를 읊어 나갔다.


 회창(會昌)의 폐불사건(癈佛事件, 845~847)을 거쳐 오대(五代, 907~959)에 들어서자 선종은 오가(五家)로 분파되면서 더욱 발전을 거듭했다. 이때는 선승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이 활동하던 시기다. 운문은 당(唐) 중기 이후 발전해 온 선과 시를 결합시킨 인물이다. 시작(詩作)에 능했던 그는 특히 선문답을 통하여 일자시(一字詩 : 一字關)라는 독특한 선시를 많이 남겼다. 이 무렵 선의 역사서이자 선문답집인 ≪조당집(祖堂集)≫과 ≪전등록(傳燈錄)≫이 간행되었다.


 송대(宋代, 960~1279)에 들어서자 운문의 계열에서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252)이 나왔다. 그는 모든 시체(詩體)에 능했던 시인이며 동시에 선(禪)의 거장으로서 ≪설두송고(雪竇頌古)≫라는 송고선시집(頌古禪詩集)을 남겼다. 이 송고선시집은 그 후 원오극근(阛悟克勤, 1063~1135)이 주석과 비평을 덧붙여 ≪벽암록(碧巖錄)≫으로 출간, 이 ≪벽암록≫은 그 후 선종의 영원한 명저(宗門第一書)로 남게 되었다.


 시단에서는 한산시풍(寒山詩風)을 모방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이 나왔고, 선 수행에 남다른 열성을 보인 소동파(蘇東坡, 1036~1121)가 나왔고, 선종 분파에 영향받아 생겨난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중심인물 황산곡(黃山谷, 1045~1105)이 나왔다. 


 소동파는 임제문하 제7대 황룡혜남의 제자인 소각상총(昭覺常總, 1025~1091)의 선법을 정식으로 이어받았고, 황산곡 역시 황룡혜남의 제자인 회당조심(晦堂祖心, 1025~1100)의 선법을 정식으로 이어받았다.


 특히 소동파 이후에는 문인들 사이에서 선 수행을 하는 이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묵조선(默照禪)의 거장 천동정각(天童正覺, 1091~1157)의 출현을 통하여 선시의 가장 심원한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공안선시집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지어 선시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의 ≪송고백칙≫은 뒷날 칭기즈칸의 행정고문관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의 주선으로 만송행수(萬松行秀, 1166~1246)의 주석과 비평을 붙여 ≪종용록(從容錄)≫으로 출간되었다.


 이 ≪종용록≫은 앞의 ≪벽암록≫과 쌍벽을 이루는 공안선시집(公案禪詩集)이다. ≪벽암록≫이 직관적이며 역동적이라면 ≪종용록≫은 명상적이며 내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권의 공안선시집은 중국 선시가 이룩한 두 개의 기념비라 할 수 있다. 


 천동정각과 동시대에 대쳬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출현, 공안선(公案禪 : 看話禪)을 제창했다. 선은, 이 간화선의 거장 대혜종고를 통해서 다시 한 번 활기를 되찾았는데 대쳬종고 이후에는 선이 문학의 영역을 넘어 성리학(性理學)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혜종고가 제창한 공안선의 입장을 조주의 ‘무(無)’자 공안에 의해서 통일시킨 선의 귀재가 나왔으니 그가 바로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였다. 무문혜개는 그의 공안시집 ≪무문관(無門關)≫(1228)을 통해서 1,700여가지 공안을 ‘무(無)’자 공안으로 묶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인도에서 비롯된 드야나(선) 명상법은 기나긴 굴절과정을 거쳐 마침내 그 극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외에 송태에 활약한 선시승(禪詩僧)에는 단하자순(丹霞子淳, 1064~1117), 야보도천(冶父道川, ~1127~) 등이 있다. 야보도천의 <금강경선시(金剛經禪詩)>는 직관력이 가장 뛰어난 선시로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송대에는 선의 공안과 일화 등을 실은 어록(語錄) 출간이 성행했는데 이 영향을 받아 엄우(嚴羽)의 ≪창랑시화(凔浪詩話)≫를 비롯, 많은 시화집(詩話集)이 출간되었다. 시화집이란 작시법을 곁들인 일종의 시 평론집을 말한다.
 이처럼 당송 시(唐宋詩)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특징은 선적(禪的)인 취향에 있었다.


 원대(元代, 1271~1368)에는 몽골족이 들여온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문단에서는 희곡이 성행, 선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그러므로 원대의 선 시인은 대부분 선승(禪僧)에 국한되었다. 수상(守常), 육당(栯堂), 조백(祖栢) 등이 그 대표적인 시인이다. 


 명대(明代, 1367~1644)에는 다시 선종이 활기를 띠었으나 당송의 융성에는 어림도 없었다. 이때의 이름 있는 선시승(禪詩僧)은 감산(憨山, 1546~1623), 자백(紫柏), 연지(蓮池), 우익(蕅益) 등이 고작이다.


 청대(淸代. 1645~1911)에는 그 시대 조류가 유 · 불 · 선 삼교의 통합이었다. 그러므로 선시는 그 독립성(禪趣)을 상실했으며 빼어난 선시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 활약한 선시승은 창설(蒼雪), 천연(天然), 차암(借庵), 입운(笠雲), 기선(寄禪) 등이다. 그리고 이때 선화(禪畵)에 능통한 네 선승이 나왔는데 팔대산인(八大山人), 석도(石濤), 석계(石溪), 절강(浙江)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