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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은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야구밖에 모르는 사고력을 넓혀, 모국의 프로야구 설립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77년 1월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장훈(오른쪽)이 어머니 박순분 여사와 함께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 장훈은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야구밖에 모르는 사고력을 넓혀, 모국의 프로야구 설립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 여사는 “아들이 뛰는 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조선일보 DB


1977년 1월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장훈(오른쪽)이 어머니 박순분 여사와 함께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 장훈은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야구밖에 모르는 사고력을 넓혀, 모국의 프로야구 설립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 여사는 “아들이 뛰는 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조선일보 DB


그날 그의 가족도 모두 살아남지는 못했다. 장훈은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6학년 누나가 그날 죽었다”고 했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큰누이는 수십 명과 함께 학교에서 쓰러졌고 어머니는 열기에 녹아 얼굴도 못 알아보는 아이들 틈새에서 명찰로 딸을 찾았습니다. 누이는 언제나 하얀 얼굴이어서 같이 길을 걸으면 남들이 ‘예쁘다’고 했었는데…. 그 얼굴이 짓물러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큰누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장훈은 “다음 날 어머니에게 ‘누난 언제 죽었나’라고 물었더니 아무 답을 안 했다”고 했다. “새벽에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났으니 아마 그때였겠지요. 지옥이라는 세계가 있다면, 그 순간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A·B·C·D등급으로 분류된 피폭자 건강수첩(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폭자에게 일본 정부가 교부하는 증명서)에 그는 A등급으로 기록돼 있다.

 

장훈은 “원폭 투하 지점에서 1㎞ 안에 있었다는 뜻”이라며 “대략 2~3㎞ 떨어져 살던 사람들도 거의 다 죽었지만 나는 살았다. 운명이란 게 무섭다”고 했다. 부유하지 못했던 그의 가족은 에도 시대(1603~1868년)부터 있던, 산 중턱의 후미진 부락에 살았다. 그 산이 원폭의 방사능과 열기를 막아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