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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장진호 철수, 한반도 적화(赤化) 막았다

12월 11일, 미 해병대 1사단은 마침내 함흥에 도착했습니다.

11월 27일부터 이날까지 보름 동안 장진호와 개마고원 일대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장진호 전투'라고 합니다.

 

이 전투만 놓고 본다면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진주만 공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는 평가가 나왔죠.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이것을 일방적인 승리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피해 규모는 중공군 쪽이 훨씬 컸습니다. 유엔군 사상자가 1만7000여 명인 데 비해 중공군 사상자는 공식적으로 4만8000여 명이고, 비공식 수치는 6만명이 넘습니다.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보름 동안 사투를 벌이는 동안 다른 부대가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까지 진출한 국군 부대도 함흥으로 퇴각했고요.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군인과 피란민 20만여 명은 흥남항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흥남 철수 작전'이라고 합니다.장진호 전투로 큰 피해를 당한 중공군 9병단이 전투 기능을 잃어 몇 개월 동안 후방에 머물게 된 것도 크게 보면

 

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요소로 평가됩니다.

덕분에 서부 전선의 미 8군이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 전문가 중에서는 만약 중공군 9병단이 건재했다면 1951년 1·4 후퇴 때 우리가 더 남쪽까지 밀려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장진호 전투가 중공군의 한반도 적화통일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장진호 전투를 평가할 때 '유엔군은 전술적으로는 패했지만 전략적으로 승리했다'

'중공군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