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학생들이 교장의 사퇴까지 거론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강경한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동맹휴학 주동자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학교장은 ‘교기(校紀)를 정정(正定)’하기 위해 단호한 처분을 내린 것이라 강변했지만, 퇴학생 보호자들은 학교 측의 호출에 불응하며 맞섰다. 이어 광주고보 동맹휴학은 광주농업학교로 번져갔고 학부형·동창회 및 재동경 광주고보 졸업생까지 포함한 맹휴 중앙본부가 발족되었다. 이는 동맹휴교가 학교 내부 및 광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서 벗어나 식민지 교육 체제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항쟁으로 성격이 변화, 발전한 것이다.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하여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며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는가 하면, 학생들에게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여 결속을 다졌으며 학교장에게는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더욱이 맹휴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경찰 취조 시의 답변 요령까지 열거된 실행 요목을 배포하기도 했다. 그들이 작성한 격문은 단순한 교육 현실에 대한 항변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 전체가 일제의 압제 하에 고통 받고 있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불온 문서’와 관련하여 이경채가 피체되자 학교 측은 취조가 끝나기도 전에 권고 퇴학을 시켰다. 이런 부당한 결정에 광주고보 4·5학년 학생 대표 11명은 학교 측에 이경채의 퇴학 이유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마침 학교에서 열리고 있던 학부형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에는 이경채의 퇴학 철회를 비롯하여 물리・화학 교실 신축 문제, 학교 경비의 투명한 집행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학부형회는 사건을 관망하는 입장에서 이경채가 무죄 방면 후에 복교 조치하라는 항의서를 학교 측에 제출하기로 결의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문제는 학교 측이 진정서를 제출한 학생대표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2~5학년 300여 명은 학교 측의 황당한 처사에 분개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교장에게 이경채의 무죄 방면 시 복교를 주장하는 한편 교우회의 자치 활동 보장, 교장의 기만적 행동 반성, 무자격 선생 사직, 일본인 교사의 양심적 반성 촉구, 무도장 신설,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현, 11명의 근신 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였다. 이경채의 퇴학 조치가 교내 문제로, 식민지 교육 비판 등으로 확산되어 나간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 방정환이 번역한 『사회주의 학설 대요』가 연재된 ≪개벽≫ 잡지(1923년 12월호) 1928년 4월경 이경채는 송정리 보통학교 사무실에 있는 등사판·원지(原紙)·줄판·인주 등을 몰래 빼내와 박병하와 더불어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하였다. 문서에는 동등한 인간으로 계급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천황은 신성(神聖)으로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말”이라고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하였다. 일본의 대정 데모크라시 당시에도 천황제 비판에는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경죄로 엄하게 처벌 받던 때였다. 또한, 그는 일제의 횡포도 무산계급의 신 사회를 건설하면 파괴된다며 이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에 들어서 그의 민족주의가 좀 더 구체화되었다. 이경채는 인쇄한 수십 장의 문서를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이나 송정리 신사 등의 전신주와 판자벽에 붙였다. 그뿐 아니라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에도 발송하였다. 이는 광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주 지역에 여러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른바 ‘불온 문서’가 시내에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로제타 홀 여사를 아십니까 김태훈 논설위원 지난달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도중 “19세기 말 한국에 온 미국의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며 구한말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2대에 걸쳐 의료 봉사 활동을 했던 로제타 홀 여사를 언급했다. 윤 대통령 연설에서 함께 언급된 언드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과 달리 로제타 홀은 생소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25세 젊은 미국인 여의사 로제타가 1890년 제물포항에 발을 디딜 때 어렵고 힘든 삶을 각오하긴 했다. 그러나 가혹한 시련이 될 줄은 몰랐다. 1894년 11월, 청일전쟁 격전지였던 평양에 의료봉사 하러 갔다가 남편 윌리엄 홀을 감염병으로 떠나보냈다. 결혼한 지 3년도 안 됐고 아들은 이제 돌인데 배 속엔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 잠시 귀국해서 낳은 둘째는 딸이었다. 그 딸마저 이질로 잃었다. 남편과 딸을 한국 땅에 묻었다. ▶이후 로제타 여사의 삶은 개인의 불행을 봉사로 승화하는 과정이었다. 교회사 연구가인 박정희의 저서 ‘닥터 로제타 홀’엔 역경 속에 인류애를 꽃피운 그녀의 삶이 기록돼 있다. 로제타는 거듭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 진정한 "스승" 한 청년이 길을 가다가 낯 익은 어느 노인과 마주쳤다. 청년은 혹시 자기를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청년은 오래 전 노인의 제자였고 노인 덕분에 지금은 교수가 됐다고 말했다. 청년은 학창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시절 자기는 반 친구의 새 시계를 훔쳤고 시계를 잃어버린 학생은 선생님에게 시계를 찾아달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시계를 훔쳐간 학생이 자진해 나와서 용서를 구하길 바랐지만 누구도 자신을 도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모든 학생을 일어나게 하고 절대로 눈을 뜨지 말라고 당부한 후 직접 학생들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렇게 하여 결국 시계를 찾았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시계를 찾았으니 이제 눈을 떠도 좋다." "그 날 선생님은 제가 도둑이라는 걸 친구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저의 자존심을 지켜주셨지요. 그 때 선생님은 어떤 훈계도 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노인이 여전히 청년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청년은 노인에게 "이 사건을 기억하시느냐?" 고 되물었다. 그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24년 동맹휴학은 일제 식민지 교육 현실에 저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뒤 1928년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1학년이었던 이경채는 식민지 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싹틔우게 되었다. 이경채는 1926년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통해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한 민족주의 의식을 가진 한국인 교사에게 민족교육을 받아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청년, 사상단체의 각종 강연회 등을 통해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1927년 여름, 이경채는 4학년 재학 당시 동리 친구인 박병하(朴邴夏)・윤해병(尹海炳)과 동교생 양태성(梁泰成)・유병후(柳秉厚)・김무삼(金武三)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독서회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비밀모임이었다. 이경채는 몇몇 친우들과의 독서회를 통해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이경채가 입학하고 얼마 뒤 일어난 동맹휴학에 학교가 어수선하였다. 1923년 일본인 선생이 이유 없이 학생을 구타하여 광주고보 역사상 처음으로 1~3학년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하였지만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경채가 경험했던 1924년 두 번째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는가 하면 처벌이 강화되는 등 장기간 지속되었다. 광주 사회에 내재된 한국인과 일본인 간의 갈등이 학교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띠기도 했다. 1924년 동맹휴학은 그해 6월경 개최된 광주고보와 광주 내 일본 선발팀 간 야구시합에서 비롯되었다. 시합 도중 일본인 의사가 광주고보 선수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고, 이에 격분한 광주고보 선수들이 그를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인 광주고보 교장은 사건을 수습하기는커녕 경찰에 조사를 의뢰하였고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무책임한 교장의 처사에 분개한 전교생 400여 명이 항의하자, 교장은 이들 모두에게 무기정학을 선언했다. 이에 학생들은 교장 사퇴를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학부형들은 전남 학부형대회를 개최하며 무기정학 처분을 취소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럼에도 학교 측에서 별다른 태도변화가 없자 학부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독립운동가,이경채 광주학생운동에 불을 붙이다 [ 李景采 ] 출생 - 사망,1910.4.6. ~ 1978.3.25. 광주고보에 진학한 열다섯 살 소년 이경채(1910.4.6.~1978.3.25.)는 1910년 4월 전남 광산군 송정리에서 이성륜(李成倫)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선생의 가정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선생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다 11살인 1920년 4월에 송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이 늦은 것은 신학문을 꺼린 부친의 영향도 있었지만, 송정공립보통학교가 그해에 설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3개 면마다 보통학교 하나씩을 설립한다는 ‘3면 1교’ 정책을 표방하면서 설립되었다. 한국인들의 학교 설립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경채는 1923년 4학년에서 6학년으로 월반한 뒤에 1924년 졸업하고 광주고보에 진학하였다. 광주고보는 1920년 5월 광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1922년 관립으로 전환되었다. 그가 입학할 당시에는 1백 명 모집에 3백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다. 고등보통학교가 부족한 데다 어느 때보다 향학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