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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공자를 계승한 유학자들의 특징은 역시 강렬한 현실 참여 의식과 지적 자산에의 갈구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잘난 집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욕을 먹는다. 다른 문화권 지배계급은 공부 압박을 그렇게 심하게 받지 않았다. 공부가 입신양명의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각광받지도 않았고. 당연히 공부를 하려면 돈이 들고 명청대 중국 사족들은 상업이나 소작료 받기 등 공부와 아무 관련 없는 일로 돈을 잘 벌기도 한다. 근데 그렇게 돈이 생기면 일단 자식을 공부시킨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덕분에 공자를 계승한 유학자들의 특징은 역시 강렬한 현실 참여 의식과 지적 자산에의 갈구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잘난 집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욕을 먹는다. 다른 문화권 지배계급은 공부 압박을 그렇게 심하게 받지 않았다. 공부가 입신양명의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각광받지도 않았고. 당연히 공부를 하려면 돈이 들고 명청대 중국 사족들은 상업이나 소작료 받기 등 공부와 아무 관련 없는 일로 돈을 잘 벌기도 한다. 근데 그렇게 돈이 생기면 일단 자식을 공부시킨다.

 

조선도 마찬가지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료면 자식이 음서로 관직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음서로 커리어 시작한 사람들도 절대 다수가 공부해서 과거를 다시 본다. 음서는 그냥 호봉이랑 짬밥 좀 쌓으려고 깔아두는 것일 뿐. 게다가 음서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낙하산 인사라는 경멸의 시선이 엄청났기 때문에 음서는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렇게 현대 한국, 일본, 중국의 공부열이 설명될 수 있고 나아가 공부에 집착하는 서양의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이 생긴것도 이런 연유라고 할 수 있다.[26] 다만 불교 국가 고려에서는 유교의 교세가 조선만큼 강하지 않았던 데에다 문벌 귀족의 관직 독점 문제가 심각하여 음서 출신도 조선처럼 멸시받지 않아 과거에 목 맬 필요가 없었다.

 

또한 스스로 전차를 잘 다룬다고 했는데, 전차를 모는 사람은 지휘관이자 전사를 의미한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27]이 넘는 거구였기 때문에 당연히 육체적 능력이 허당이었을 리가 없다. 덩치도 덩치지만 공자는 목수 일이나, 장의사일, 전차 몰기, 창고지기 등 온갖 궂은 노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심지어 그 자로[28]를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얘기도 있다. 위에서 말한 육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자들에게 군사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춘추시대 때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없었다. 공자는 본래 무장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고[29], 공자로부터 무예와 군사를 부리는 일을 배운 제자도 있었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첫 관직생활을 했을 때부터 그를 증오하는 자들의 습격으로 여러차례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공자가 호신술을 제대로 안 익혔으면 후에 노나라로 돌아가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원래 춘추시대의 당대의 사(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 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정치를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 하는 것이 사(士)였다. 즉, 공자의 집단은 거의 무장세력이었다. 당대에는 이런 무장세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것을 제자백가라 부른다.[30] 물론 싸움만 하는 건 아니며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업무를 다루기 위해서 학문도 갈고 닦았다.[31] 참고로 고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과 지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장은 개인돈, 또는 지휘관의 돈으로 구비하던게 근대 이전 이야기여서 덕분에 군대의 의장과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즉 돈 없으면 전쟁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약탈하는 권리 또한 개인의 지위와 재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 때문에 지휘관이나 피 정복민은 그를 막으려면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의 권리가 커져 고대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스 군대가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 보병부대 위주로 구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경제력과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