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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현각(永嘉玄覺, 675~713)이라는 선승이 출현, <증도가(證道歌)>를 남겼다

이 증도가는 깨달음의 희열을 노래한 장편시로서 깨달음의 기쁨을 참지 못하여 단 하룻밤 만에 완성했다는 작품이다. 이 뒤를 이어 석두희천(石頭希遷, 709~791)의 <참동계(參同契)>가 나왔다. 선승들이 시를 빌려 자신의 심정을 읊은 것(以詩寓契)과 마찬가지로 시인들 사이에서도 시의 정취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선에 접근하는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인은 왕유(王維, 701~761)였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영가현각(永嘉玄覺, 675~713)이라는 선승이 출현, <증도가(證道歌)>를 남겼다.

이 증도가는 깨달음의 희열을 노래한 장편시로서 깨달음의 기쁨을 참지 못하여

단 하룻밤 만에 완성했다는 작품이다.

 

이 뒤를 이어 석두희천(石頭希遷, 709~791)의 <참동계(參同契)>가 나왔다.

선승들이 시를 빌려 자신의 심정을 읊은 것(以詩寓契)과 마찬가지로 시인들 사이에서도

시의 정취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선에 접근하는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시인은 왕유(王維, 701~761)였다. 


 왕유는 선의 체엄을 그대로 시화(詩化)했던 시인으로서 후세에 선시의 거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왕유는 신회(神會, 670~762), 보적(普寂, 651~738) 등 당시 제1급 선승들과 교제가 깊었으며

시간만 나면 언제나 좌선의 실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왕유에 이어 맹호연(孟浩然, 689~740), 이백(李白, 706~762), 두보(杜甫, 712~770), 장계(張繼, ?~?) 등

성당(盛唐)의 제1급 시인들이 다투어 선에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당시(唐詩)라 일컬어지고 있는 불후의 명작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백은 선(禪)에서 출발하여 도가(道家)의 유현한 세계로 들어갔고, 두보는 비참한 현실고(現實苦)를 시화(詩化)해 나갔다.
 중당기(中唐期, 767~829)에 접어들자 마조도일(馬祖道一, 769~798)이 출현,

중국 선종은 본젹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외치며 지금까지의 상류층 중심의 생활선(生活禪)으로 구체화시켰다.

 

마조의 제자 백장회해(白丈懷海, 749~814)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선수행장(禪修行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백장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실천을 통하여 집단농장 체제의 선 수행장을 만들었는데 이 선 수행장의 생활 지침서인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이때 나왔다.

 

말하자면 인도의 소극적인 계율이 중국의 적극적인 윤리강령으로 바뀐 것이다.

 

전설적인 인물 한산(寒山, 766?~779?)이 나타난 때도 이 무렵이었다. 한산은 인생무상을 읊어 산거선시(山居禪詩)의 전형을 남겼다.

 

이어 한퇴지, 백낙천, 유종원 이하 등이 등장한다. 철저한 배불론자(排佛論者)였던 한퇴지(韓退之, 769~824)는 불경의 역문체(譯文體) 영향을 받아 산문으로 시를 쓰는 산문체 시형식을 완성시켰다.

 

그는 또한 선사상(禪思想)을 유학(儒)으로 개조하였으며 성리(性理)를 논하는 그의 문장은 송대 성리학(性理學)의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