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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

 선(禪)은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언어에 뒤따르는 사고작용마저 선은 용납하지 않는다.

대신 선에서는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의 직관적인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선시 


 선(禪)은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언어에 뒤따르는 사고작용마저 선은 용납하지 않는다.

대신 선에서는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의 직관적인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선(禪)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선을, 그 깨달음을 제삼자에게 알리자면 여하튼 어떤 식으로든 표현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승 임제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크게 고함을 질렀고,

덕산은 무조건 몽둥이를 휘둘러댔던 것이다.

 

일반의 상식에서 벗어난 이런 식의 미치광이 짓을 통해서

그들은 솟구치는 깨달음의 희열을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미치광이 짓을 통해서는 깨달음의 그 섬세한 느낌은 도저히 전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칫하면 저 관념의 바다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그 깨달음의 섬세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하여 시(詩)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란 언어의 설명적인 기능을 최대한 억제시킨 비언어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승들은 그들의 깨달음을 시를 통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첫 번째 선시의 출현이다.


 이렇게 하여 남성적인 ‘선’은 여성적인 ‘시’와 만나 더욱 활기차게 발전해 갔다.

선이 시와 결합하여 이런 식으로 발전해 가자

이번에는 시인들 사이에서 시의 분위기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선에 접근하는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이것이 두 번째 선시의 출현이었다.


 첫 번째 선시는 대통신수(大通神秀)를 위시한 중국 · 한국 · 일본 선승들의 작품인데,

깨달음의 희열을 읊은 개오시(開梧詩)와 산생활의 서정을 노래한 산거시(山居詩)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선시는 주로 왕유(王維)를 위시한 당송 시인들의 작품인데

선적(禪的)인 분위기가 풍기는 선취시(禪趣詩)와 선적시(禪迹詩)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선승들과 시인들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전시를 쓰는 풍조가 일자

선과 시는 상호보충적이며 둘이 아니라는 직관파 시론가들의 선시론(禪詩論)까지 나오게 되었다.


 “시는 선객(禪客)에게는 선을 장식하는 비단 위의 꽃이요,

선은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를 절제하는 절옥도(切玉刀: 옥을 자르는 칼)이다. 


 “선의 핵심은 깨달음에 있다.

시의 핵심 역시 깨달음에 있다.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 있고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직관파 시론가의 대표적 인물인 엄우의 이 묘오론(妙悟論)은

후대에 시를 지나치게 선적(禪的)으로 해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 여기서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우선 접어두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선시(禪詩)란 무엇인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요,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선시란 언어를 거부하는 ‘선’과 언어를 전제로 하는 ‘시’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다.

부정이라는 남자와 긍정이라는 여자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