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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동시장은 훔친 물건인 장물이나 가짜 골동품 등을 거래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장물거래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1960년대의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를 등에 업고 도둑들은 훔친 물건을 처분하기 위해 황학동시장을 찾았고, 일부 상인들은 가짜 골동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던 것이다.

황학동시장은 이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벗기 위해 애썼다. 특히 고가의 골동품을 다루는 골동품점 상인들을 중심으로 노력한 결과 크게 호전되었지만 한 번 붙은 주홍글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이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이 무렵 동대문 안 동대문시장이 크게 발전하면서 배후 상권으로 과일과 채소를 파는 청과물시장, 참기름, 들기름 등을 파는 기름 장수들이 황학동 인근에서 장사했다.

이 주변에 일제강점기인 1923년 창신동에 개설되어 땔감과 채소를 파는 시탄소채시장과 1941년에 신당동에 개설된 공설시장이 있다. 이 공설시장은 해방 후 성동시장이 되었다가 오늘날 서울중앙시장이 되었다.

황학동 일대가 크게 변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전쟁의 폭격으로 황학동과 왕십리 일대에 모여 있던 집들이 파괴되고 말았다. 게다가 북쪽에서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란민과 한국전쟁 이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 천변을 주거지로 선택하면서 청계천 일대는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피란민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을 펼쳐 고물상을 하면서 청계천에 시장이 형성되었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황학동으로 확장되었다. 황학동에는 고물상이 많았고, 미군 물품을 파는 노점과 사창가가 난립해 혼란스러웠다.

한편 황학동에는 전국의 미곡과 채소가 집산되어 도소매하는 큰 규모의 성동시장이 생기면서 그곳을 거점으로 주변에 노점과 고물상 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청계천에 형성된 노점들은 북쪽에서 내려온 노점상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평화시장으로 많이 빠져나갔고, 황학동에는 고물상만 남았다.

고물상들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사이에 한국전쟁 이후 재건하는 과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을 수거해서 되팔며 이익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고물상들 가운데에는 골동품을 취급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한때는 가발에 사용되는 머리카락이 이 시장을 통해 많이 수출되기도 했다.

이 무렵 황학동시장은 훔친 물건인 장물이나 가짜 골동품 등을 거래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장물거래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였다. 1960년대의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를 등에 업고 도둑들은 훔친 물건을 처분하기 위해 황학동시장을 찾았고, 일부 상인들은 가짜 골동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던 것이다.

황학동시장은 이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벗기 위해 애썼다. 특히 고가의 골동품을 다루는 골동품점 상인들을 중심으로 노력한 결과 크게 호전되었지만 한 번 붙은 주홍글씨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황학동시장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60년대 중반이었다. 청계천 천변에 큰 화재가 발생해 큰 피해를 입었고,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사창가 또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거기에 1969년에 황학동 일대의 청계천 복개 공사가 끝나면서 청계천 천변에 즐비했던 판자촌이 모두 철거되고 말았다.

판자촌 대신 들어선 것은 7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인 삼일시민아파트였다. 청계천고가도로 양쪽으로 19동에 이르는 대형 주택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황학동은 새롭게 탈바꿈했다.

이를 계기로 황학동시장도 기존의 골동품점 상인들을 중심으로 결속력을 다졌다. 정부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고 청계천8가의 골동품상가로 인정받은 것이 이 무렵이었다.

골동품점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더욱 번창했다. 한국 사회에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정비를 목적으로 새롭게 단장하면서 많은 골동품들이 시장으로 많이 흘러나왔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새마을운동이었다.

새로운 마을, 도시를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과거의 것은 낡은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는 과정에서 손때 묻은 과거의 문화유산들이 골동품이 되어 시장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골동품 상인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수집했다. 또한 아주 싼 가격에 구매한 물품이 비싼 것으로 판명되어 큰 횡재를 했다는 일화가 심심치 않게 전해진 것도 이때였다. 이 과정에서 국보급 문화재가 발굴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