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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눔 스토리 가슴 따뜻해지는 생명 나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빠, 제 노래를 들어주세요.
2014년 7월, 7살 유나는 하늘같던 아빠를 잃었습니다. 유나 아빠는 지주막하 출혈로 입원 10일 만에 뇌사상태가 되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평소 아들의 뜻대로 장기기증을 하여 3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유나엄마는 필리핀인인데. 남편이 돌아가 신 후,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에 유나는 자연스레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유나는 할머니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었습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생명나눔 스토리
가슴 따뜻해지는
생명 나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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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아빠, 제 노래를 들어주세요.
2014년 7월, 7살 유나는 하늘같던 아빠를 잃었습니다. 유나 아빠는 지주막하 출혈로 입원 10일 만에 뇌사상태가 되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평소 아들의 뜻대로 장기기증을 하여 3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유나엄마는 필리핀인인데. 남편이 돌아가 신 후, 생계를 이어가야 했기에 유나는 자연스레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유나는 할머니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었습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만 하는 유나엄마가 일을 하는 동안 할머니는 학교며 학원, 친구관계에 신경 쓰며 행여 부족할 새라 마음 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나는 점점 말이 없어져갔고, 남들 다 있는 아빠가 본인에게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는 우리아빠는 멀리 해외출장을 갔노라고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아이들이 자기를 놀릴까봐 그랬다는데,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됐구나 싶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할머니는 그 마음을 어떻게 치유해줘야 할까를 고민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우연히 장기기증자 유가족 모임에 갔다가 기증자 유가족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든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평소 노래 부르는걸 너무 좋아하는 유나에게 합창단을 추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나는 그때부터 현재까지 생명의소리합창단에서 어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합창단은 기증자 가족과 이식을 받은 수혜자들로 구성된 특별한 합창단이었기에 유나 얘기를 들은 모든 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자처하여 유나의 이모, 삼촌, 큰아빠, 큰 엄마가 되어 주었습니다. 2주마다 하는 정기연습에 유나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첫 해 세계장기이식 및 구득학술대회와 세계 장기기증자의 날 행사에서 당당히 제몫을 해냈습니다. 전 세계 의료진들은 유나가 기증자 가족이라는 말을 듣고 유나와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섰을 정도였습니다.유나는 합창단을 통해 아빠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을, 그것도 3명의 목숨을 살렸고, 그들 가족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더 이상 아빠가 장기를 기증하고 하늘나라에 계시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숨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3학년이 되면서 유나는 당당히 반장선거에 출마하였고, 결국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여 반장이 되었습니다.유나는 하늘에 계신 아빠가자기 노래를 듣고 답을 해줄 것 만 같다고 얘기합니다. 멀리 광양에서 온 가족이 올라오는 수혜자 홍광진님의 딸 홍은서(초4)양과 언니 동생으로 친자매처럼 지내는 모습을 보며, 비록 가족을 잃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새롭게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이들 모습은 보는 것 자체로도 너무나 감동적입니다.유나는 지금도 주말만 되면 늘 아빠가 오던 시간에 못 올 걸 알면서도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입니다. 2016년부터 같은 경험을 한 기증자 유가족 중 한분이 딸 이름을 따서 아신 장학회를 만들고, 유나에게 작지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비록 금액은 적지만 이런 주변의 격려가 자양분이 되어 유나를 바꾸고 있습니다.아빠가 장기기증을 했으니, 자기도 아빠 뜻에 따라 살겠다며 곱게 기르던 머리를 잘라 소아암 어린이를 위해 가발 만드는 곳에 기증하였습니다. 장기기증 희망서약도 하고 싶어 하지만 아직 미성년이라 15세가 되면 보호자 동의아래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습니다.시간이 흘러 이제 유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소심하고 두려워하던 눈빛은 개구쟁이 눈빛으로 바뀌었고, 다른 아이들처럼 호기심 많은 아이로 변하였습니다. 지금은 학급 반장을 맡아 리더쉽을 발휘하며 교내 행사에 대표 단골로 출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필리핀 엄마에다가 아빠가 안 계신 상황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역할을 다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나는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고 있고, 또 아빠로 인해 알게 된 장기기증이라는 소중한 끈을 놓지 않으며, 할머니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한국어가 서툴러서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하여 적절하게 할머니와 엄마 사이를 이끌어가는 것도 유나의 역할입니다. 기증자 가족들은 가족을 보낸 슬픔에 너무나 힘든 시간들을 보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상황에서 가족을 보내기 때문에 그 후에 그리움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유나는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할머니에게 아들을 대신하는 기쁨이고 삶의 이유입니다. 기증자 가족으로 당당하게 문제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어린 유나에게 격려와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하나의 마을 주민이 되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유나가 그린 그림으로 만든 2014년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카렌다>하늘에 계신 아빠,제 노래를 들어주세요.  
꽃처럼 아름다운 20대의 삶, 천국에서 활짝 꽃피우길
저는 지난 2014년 12월에 갑작스런 사고로 새 생명을 선물하고 떠난 유아라 엄마입니다.제 딸, 아라는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큰 딸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딸만 둘이 있는데, 특히 큰 딸 아라는 저에게 딸이자 친구이자 어떤 때는 남편처럼 의논 상대가 되어주는.....제가 가장 많이 의지하는 듬직한 딸이었습니다. 우리 아라는 노래를 참 좋아했습니다. 아라가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정말 환호성을 지를 만큼 노래를 잘했고 또 좋아했습니다. 또한 요즘 젊은 애들답게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동생과 함께 교회의 성가대도 자원해서 활동하는 착실한 아이였습니다.연말연시 분위기로 약간 들떠 있던 3년 전 12월 겨울이었습니다. 횡단보도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던 우리 아라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다는 가슴 떨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리 아라는 심장도 뛰고, 손발도 따뜻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인공호흡기를 낀 아라는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의사 선생님을 만나니 뇌사일 것 같다는 얘기와 장기기증이라는 방법도 있으니 생각해보라는 가슴 철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몸이 따뜻한데....심장이 뛰고 있는데....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아무리 도리질을 해봐도 내 눈앞에서 자꾸만 나빠져 가는 아라의 상태를 보면서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우리 가족은 장기기증을 선택하였습니다.생전에 남을 돕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착했던 내 딸 아라가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도와주고 떠나려 하는구나....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속에 살아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장기기증을 선택했습니다. 아라가 그렇게 떠난 지도 어언 4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 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수시로 밀려오는 이 그리움과 아픔은 사라지지 않겠지요. 2015년 8월, 저는 하늘나라에 있는 아라가 제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평소 아라가 좋아하던 합창단에 들어왔습니다. 기증자 가족들과 이식인들 그리고 의료인등이 모여서 만들어진 “생명의 소리 합창단”에 들어와 노래를 부르다보니, 가사 내용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 노래를 부르다가도 딸 생각에 목젖이 아프도록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야했습니다. 합창단을 통해 다른 기증자 가족 분도 만나고, 우리 아이의 장기를 직접 받은 분은 아니지만 장기이식을 통해 건강하게 살아가는 많은 수혜자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연습을 통해 우리는 생명나눔이라는 공감대로 더 가까워졌고, 마음을 나누고 하나가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집에 있을 때는 나 혼자만 이런 슬픈 일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합창단에서 같은 경험을 한 다른 가족들을 만나면서 구구절절한 사연에 눈물도 같이 흘리고,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며 의지할 구석이 생겼습니다. 마음 둘 곳이 없고, 불안하고 자꾸만 동굴 속으로 들어가던 저는, 합창단을 통해 언니도 생기고, 형부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쉽게, 서로의 얘기에 공감대가 형성될 줄은 몰랐습니다. 기증을 했고, 가슴에 자식을 묻었다는 공통점으로 저는 위로를 받기도 했고, 위로를 줄 수 있었습니다.저는 장기기증 후 다양한 주변인들의 반응을 보았습니다.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냐고 격려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저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가장 가까운 우리 가족이었습니다. 특히 돈을 얼마 받았냐는 얘기는 제 가슴에 비수가 되었고, 우리가족이지만 너무나 미웠습니다. 장기기증으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했을 뿐인데, 마치도 자식을 팔아먹은 듯한 뉘앙스는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많지도 않은 지원금가지고 이런 오해를 받으니 억울하기도 하고, 울분도 쌓였습니다. 하루는 후회했다가 또 하루는 잘 했다고 생각하다가 반복되는 상념 속에 똑같은 경험을 한 유가족들을 만나게 되니 의지도 되고, 마음을 온전히 터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장기기증자를 위한 공원조성을 위해 서명을 받으러 다닐 때는 작지만 우리 사회에 좋은 일을 하고 있구나~하는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습니다.만약 그때 장기기증을 안하고 허무하게 그냥 보냈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기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불편 할 수도 있고, 가끔씩 후회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하게 살고 계신 이식인을 보며, 기증을 안했더라면 아무 의미 없이 한 줌 재로 밖에 남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나마 기증의 기회를 갖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우리 아라로 인해 새 생명을 살게 되신 분은 5명이라고 들었습니다.기증받은 그분들이 언제 어디서나 건강하시길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누구인지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지만 제가 늘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여러분도 우리 아들딸들 몫까지 건강하게 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아이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가끔 잊혀진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너무나 허무합니다. 그리고 장기기증 활성화뿐만 아니라 기증한 분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지도록  정부에서도 같이 노력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꽃처럼 아름다운 20대의 삶, 천국에서 활짝 꽃피우길故 유아라 엄마 박 정순
7명을 살리고 간 응상이를 향한 그리움, 입술을 깨물며 애써 참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저에게는 아들2명이 있었습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큰아들과, 하늘나라로 떠났지만 언제나 제 가슴속에 살고 있는 둘째아들, 응상이입니다.응상이는 4살 때 뇌수막염을 앓았습니다. 감기인줄 알고 동네 병원에만 갔었는데 알고 보니 뇌수막염이었고, 상황은 점점 안 좋아져 당시 입원했던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병원에서조차 포기한 우리 아들은 하나님이 돌보셨는지 식물인간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후유증으로 그만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 후 아이에게 좋다는 치료는 다해봤는데, 그 덕분인지 얼마 못 살 거라던 아이는 스물다섯 해를 넘겼습니다. 이렇게 제2의 삶을 살고 있던 응상이에게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2015년 2월, 그날은 외할머니 90살 생신 잔치여서 온 가족이 모여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음식물이 그만 기도를 막아 응상이가 숨을 쉬지 못한 것입니다. 응급처치를 하면서 병원으로 옮겼으나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20여 년 전, 한번 기적을 경험했기에 저희 가족은 한 번만 더 기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일주일을 버티던 응상이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응상이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25년 동안 어렵게 키웠는데, 이왕 갈 아들이라면 아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아들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처럼, 질병으로 아픈 다른 가족의 심정도 똑같지 않을까? 우리 아이는 비록 뛰어 다니진 못했지만 이식을 받은 사람은 제 발로 뛰어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증을 결정하는게 어렵지만은 않았습니다.결국 기증을 위해 어려서부터 오래 다니던 연세대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고,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장기기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응상이가 기증했다는 사실을 병원 소식지를 보고 알게 된 주치의 선생님은 우리 부부를 불러 따뜻한 위로를 해주셨습니다.우리 응상이는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장애를 앓았기에 어린 시절은 매일매일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후천적 장애로 아픈 자식이었기에 부모마음은 더욱 애틋했고, 그날의 음식물 사건은 우리가정의 행복을 앗아갔습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 봐도 돌아오지 못하는 우리아들, 우리는 결국 장기기증을 선택하였고 7명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응상이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생명의 소리 합창단을 통해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낍니다. 가사 마디마디가 딱 제 마음 같았고, 노래 부르다가 울기도 많이 울곤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조금이나마 힐링이 되는듯합니다. 7명을 살리고 아름다운 별이 된 우리 응상이, 하늘나라에서도 밝고, 맑게 그리고 편하게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편치 않은 몸으로 살아왔던 아들이었기에 이제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7명을 살리고 간 응상이를 향한 그리움, 입술을 깨물며 애써 참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故 이응상 엄마 김애자 
미안하다, 사랑한다.
2013년 4월, 제 인생에게 있어 가장 잔인한 계절을 맞았습니다. 당시 34살이던 딸아이가 사고로 응급실에 갔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딸은 이미 상태가 상당히 나빴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를 살리는데 집중해야겠기에 의사가 말하는 뇌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아이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감기처럼 치료하면 나을 줄로 생각했습니다.하지만 장기구득 코디네이터란 분이 와서 장기기증에 대해 안내를 하더군요.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일반인이었기에 뇌사라 해도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보고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는 것도 딸이 원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딸은 평소 장기기증을 하겠다고 말해왔고, 유기견을 돌보거나 어려운 이웃 노인들을 위한 봉사를 꾸준히 하던 아이였거든요. 우리 부부는 어렵게 기증을 결정했고, 만성신부전으로 고생하던 20대 여성에게 신장이 이식되었습니다.당시 제 아내는 기증을 많이 반대했지만 딸아이의 생전 뜻이 그랬다는 걸 알기에 마지못해 동의했습니다. 당시 기증을 강하게 반대하던 아내는 “그때 장기기증을 안하고 그냥 보냈더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당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나에게 잘해준 일이 바로 장기기증을 하도록 한 것”이라며 당시 제가 강하게 기증을 주장해준 게 너무 고맙다고 말합니다. 기증 이후, 갑자기 떠난 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상처로 너무나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치유되는 과정일 수도 있으나 딸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 병이 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기증을 이끌어주신 한국장기기증원에서 장기기증을 활성화하기 위해 유가족들의 협조가 필요한데, 유가족들의 협조가 잘 안되고, 모두들 숨으려고만 해서 곤란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장기기증처럼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서도 자꾸 움츠러들기보다는 뭔가 적극적으로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후, 한국장기기증원에서 주선하는 거의 모든 일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먼저 그 해 한국장기기증원 annual report에 기증자 유가족 대표로 인터뷰를 했고,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에‘14년 1월 30일자에 “책갈피마다 딸의 추억, 아버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인터뷰 기사가 나갔습니다. 이후 4월에는 KBS 1TV 강연 100゚C란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제목으로 장기기증을 하고 떠난 딸에 대한 얘기를 방송한 바 있습니다. 이후 여기저기 인터뷰가 쇄도하여 KBS 생로병사의 비밀과 뉴스 등 여러 매체에 출연하였습니다.그동안 기증자 유가족들 대부분이 인터뷰를 하거나 외부 행사에 나타나려고 하지 않았기에 저의 자그마한 도움이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장기기증원 자체 홍보 동영상제작이나 대한이식학회 주최 이식인 체육대회 등에 유가족 대표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이식인 체육대회에서 이식을 받은 수혜자 분들이 나와 울면서 기증자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하는걸 보고 벅찬 감동과 함께 장기기증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이후 저는 저 또한 장기기증을 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술과 담배를 일절 끊었고, 그 결과 고혈압, 당뇨 등이 거의 정상에 가깝게 올라오는 놀라운 변화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도 많이 개선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거부감으로 인해 기증 관련 설명조차 듣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기증을 한 가족으로서 추후 필요하다면 기증을 망설이는 가족들을 만나  장기기증이 얼마나 옳은 선택인지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저는 스스로 장기기증 홍보대사라고 생각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장기기증 자원봉사자로 장기기증 활성화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딸 아이 기증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장기기증에 대해 얘기하곤 합니다. 우리 딸은 책을 너무나 좋아하였습니다. 아신이가 간 후 읽던 책을 문화 혜택을 못 받는 강원도 정선에 있는 “여량고등학교”에 기증하였는데, 해마다 신간 서적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매일 아침 등교하자마자 한 시간씩 아신문고에서 책을 읽고 수업에 들어간다는 얘길 들으며,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저는 너무 기뻐서 이 학생들에게 동기부여가 되도록 매년 200만원씩을 장학금으로 지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의소리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기증자 가족들끼리 서로 보듬으며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만큼 좋습니다. 저의 나머지 생을 장기기증처럼 남을 위한 봉사에 쓸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죽어서도 부모에게 삶의 교훈을 가르쳐 주는 우리 딸이 나중에 만나면 잘 했노라”고 칭찬해줄 것만 같습니다. 장기기증 활성화 운동은 제가 딸에게 가지는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는 하나의 작은 몸짓입니다.  미안하다,사랑한다.故 송아신님 아버지 송종빈님
제게 심장을 주신 기증자 분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양띠로 올해 65살이 되었고, 심장을 이식한 나이로는 만 12년 2개월이 된 김영희입니다.  저는 2000년 10월, 46세에 유방암 3기로 왼쪽 가슴 절제수술을 받고, 항암주사를 6회 받았습니다. 제 경우에는 항암주사를 처음 맞은 날부터 2~3주 동안은 심하게 아프고 토했고, 구내염으로 입안은 다 헐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음식냄새는 물론 화장품 등의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고 체중이 5~6kg이나 빠졌습니다. 그러다 신기하게도 4주째가 되면 증상이 완화되어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와 항암주사를 다시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회 정도 받으면서부터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숨까지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증상은 점점 심해졌지만 마침 겨울이었고 감기 인줄만 알고 그냥 넘어갔습니다.그러면서 저는 6회 까지 항암주사를 모두 마쳤고, 다음으로 방사선 치료를 6주간 30회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첫날부터 기운도 없고 숨이 차서 걸을 수가 없었고 결국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을 가야 했습니다.방사선에서 진료를 받으면서 이런 증상을 얘기하자 종양혈액내과 선생님과 연락하시더니 응급실로 입원을 시키셨고, 결국 방사선 치료는 2회만 하고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습니다.제 병명은 ‘유방암 항암주사 약물중독으로 인한 급성 심부전 말기’였습니다. 이렇게 긴 병명을 가지고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3년 넘게 지냈습니다.암 수술 후에는 ‘난 이제 다 나았겠지?“라는 생각으로 희망을 가지고 힘겨운 항암주사를 견뎌냈습니다. 그런데 심부전 투병 3년은 정말이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산송장 같은 세월이었습니다. 겨우 대여섯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서 서 있거나 주저앉아야 했고, 열 발자국도 안 되는 화장실을 벽을 잡고 살살 걸어가야 했습니다. 또 3년 동안 제대로 누워서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었습니다. 누우면 숨이 차올라 숨쉬기가 힘들어 5분도 못되어 일어나야 했고, 앉아서 졸다가 허리가 아프면 다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고 이러면서 매일 밤낮을 지냈습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혀 저 깊은 암흑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정신을 잃으면 119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가서 입원을 하는 일이 수차례 반복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초등학교 교사였던 저는 할 수 없이 2년 병가휴직을 신청했습니다. 교직을 천직이라 여기며 자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교사 생활을 했던 저는 주위의 권유로 40이 되어 뒤늦게 교감으로 승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승진연수대상 차출을 눈앞에 두고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1년부터 2004년 11월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집에 있는 시간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3년 동안 저는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이 힘들어 할까 봐 겉으로 힘들다, 아프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딸은 대학생, 아들은 고등학생이었어요. 다 컸다고는 하지만 아들은 가장 중요하고 힘든 고교시절 3년을 제 돌봄 없이 지낸거죠.투병하는 엄마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까까머리에 모자를 쓰고는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뿐이었습니다. 부엌일을 해본 적 없던 남편은 이제 압력솥 밥만큼은 저보다 더 잘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내 역할, 엄마 역할을 못해주는 내가 어떻게 힘든 내색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마음으로 제 마음을 숨겼지만 사실 저에게도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습니다.그러다가 2004년 10월 말 어느 날, 그날은 정기 진료일 이었습니다. 병원에 가는 도중 남편은 심장내과 담당선생님께 심장이식을 신청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심장이식이라는 말에 이식하다 죽으면 어떡하냐, 무서워서 그냥 지금처럼 살다가 죽겠다...그렇게 남편과 아웅다웅하며 병원에 도착했는데 진료가 끝나자마자 쓰러져서 바로 입원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식을 해야만 살 수 있다는 말에 실낱같던 희망도 무너져버렸나 봅니다. 그때까지 저는 장기 이식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지도 못했고, 그저 치료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을 거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남편과 가족들은 제가 길어야 2년이라는 심장기능 시한부 환자라는 것과 심장이식 외에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미 들었던 거죠. 그렇게 한 달 정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기 얼마 전 장기이식센터에 이식대기자로 등록하라는 희소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등록을 해도 금방 이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전국순위이고 여러 가지 조건이 저와 맞는 심장이어야 하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일지라도 이식이라는 희망이 다시 생겼다며 감사해 했고 좋아 했습니다. 그날 오후 4시경에 등록을 하고,다음날은 하루 종일 검사를 하러 다녔습니다.그리고 그 다음 날 2004년 11월 26일 점심 때 쯤~ 장기이식 대기자 등록 후 이틀째 날 (약 40시간 후)이었습니다. 주치의 선생님이 점심을 한 숟가락만 먹으라며 교통사고로 뇌사가 된 분이 계시는데, 기회가 올수도 있다~ 지금 준비 중이다~ 이식받을수도 있을 것 같다~ 며 너무 좋아 귀띔해 주러 왔다는 겁니다. 반신반의 하는데 오후가 되니 주렁주렁 주사약이 들어오면서 수술준비를 시키는 겁니다. 출근했던 남편이 서둘러 들어오더니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면서 이식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드디어 오후 7시경에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 오전 10시경 의식이 깨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나온 말은“어! 누워 있는데 숨이 안차네~?어~ 와~~” 이런 감탄사였습니다.행복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제게 심장을 주신 기증자 분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이렇게 극적으로 여러 분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50세에 심장이식을 받게 된 저는 12년째 건강하고 행복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다시는 교단에 서지 못할 줄 알았는데, 심장이식을 받고 6개월 후 학교로 복직해서 다시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 덤으로 얻은 새로운 삶, 보람된 일을 하면서 살자라는 생각으로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심리상담 석사과정을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마쳤습니다. ♥ 지금은 35년간 사랑과 정열을 쏟은 교단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 5년 전부터 취미활동을 하며 자격증을 딴 4줄 기타인 우쿨렐레로  강사활동과 재능기부도 하고, 우쿨렐레 앙상블 단원으로 국내공연,  해외공연을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 그리고, 2016년에는 한국장기기증원에서 운영하는 ‘생명의 소 리 합창단’에 입단하여 정기 공연과 봉사공연, 홍보공연 활동 등을  하고 있습니다.‘생명의 소리 합창단’은 장기를 기증해 주신 기증자유가족과 이식수혜자, 장기기증희망 서약자, 의료진, 유관기관 종사자 등으로 구성된 장기기증 홍보 합창단입니다.저는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이식수혜자로서 장기 기증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가족을 잃은 장기기증 유가족 분들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기증자 가족들의 아픔과 숭고한 정신에 온 마음을 다해 고마울 뿐입니다. 처음 유가족들을 직접 뵈었을 땐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죄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기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제가 살아날 수 있었다는 감사함과 미안함, 죄책감이 동시에 들었던 거죠. 가족을 잃은 그분들이 슬픔과 그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면 저 역시 눈물이 쏟아지고 마음이 한없이 아팠습니다. 합창단을 통해 가족들의 아픔을 알게 된 이후로 더 마음 쓰게 되고, 더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 삶은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니까요.그런 의미에서 기증자에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인 생명의 소리 합창단원으로 함께 하게 되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장기를 기증하신 분이 안계셨다면, 장기를 기증할 수 있게 사랑을 나눠 주신 가족 분들이 안계셨다면,고귀한 장기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의사선생님들이 없으셨다면,저는 이미 10년 전에 생을 마감했겠죠.  그렇기 때문에 기증자의 숨결과 심장의 고동이 제 몸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면서 저와 함께 살아 계신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유가족 분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저를 보며 기증의 보람도 느끼고, 내 부모, 내 아들 딸, 내 형제가 수혜자분들과 함께 저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위로를 받게 하고 싶습니다.그리고 장기 이식만이 살 길인 죽음 앞에 있는 환자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시는 기증자와 그 가족 그리고 의료진 여러분, 장기기증을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을 담아 사랑과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김영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