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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는 숙종·영조·정조 대 저명한 관료가 많이 배출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후예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서유구는 숙종·영조·정조 대 저명한 관료가 많이 배출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후예로,

이조판서를 지낸 서호수(徐浩修, 1736-1799)와 한산(韓山) 이씨(1736-1813)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764, 영조 40).


중시조는 선조대의 명신 약봉藥峰 서성(徐渻, 1558-1631)으로, 약산춘이라는 명주가 이때에 전해졌다고 풍석은 전한다. 약주藥酒라는 말이 그에게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서성의 넷째 아들 서경주(徐景霌, 1579-1643)는 선조의 부마였다. 이로부터 2대 아래는, 풍석의 고조 서문유(徐文裕, 1651-1707)로 예조판서를, 증조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조부는 규장각 설립을 주도한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다. 서유구는 어려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정조 대의 중요한 학자 관료였다. 주역 등 역학에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천문·지리·농업·언어 등 다양한 방면에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는 총 60책으로 정조(正祖, 1752-1800)로부터 “조선 400년 동안에 이런 거편(鉅篇)은 없었다”는 최고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보만재’도 바로 정조가 친히 하사한 호다. 풍석은 어린 시절 주로 할아버지 임지에 따라 다니며 글을 배웠고, 따라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만재총서>> 중 『위사』를 편술하기도 했고, 22세에는 농학 저술인 『본사本史』의 일부를 조부의 명을 받아 보충저술을 하기도 했다. 정치가로서, 학자로서 조선 최고의  경지에 오른 70세의 보만재가 손자에게 자신의 저술의 일부를 맡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단지 할아버지와 손자 간의 정뿐만 아니라, 풍석의 학문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풍석에게 부친 서호수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는 않지만, 고위 관료이면서 유학(철학)이나 경세학(정치학)이 아닌 분야에 특이한 취향과 전문성을 보유했다는 점은 역시 할아버지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닮았기도 했다.

 

아낙네에게 필요한 가정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의 저자인 빙허각(憑虛閣) 이씨는 서유구의 하나 뿐인 형수다. 빙허각 이씨의 남편은 서유본(徐有本, 1762-1822). 박지원에게서 동생 서유구와 함께 문장 수업을 받기도 했던 이다.

 

서유구의 작은할아버지는 정조의 일등공신으로 정조 재위 초기에 삼정승을 거친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이다.

작은아버지이자 서유구의 스승이기도 한 서형수도 과거 급제자로, 규장각 편찬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순조 초기 옥사에 연루되어 18년 간 귀양살이를 하기 전에는 경기관찰사를 역임했다. 풍석이 어렸을 때 가르침을 많이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학문적 벗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