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의 후신)
그 뒤 이경채는 1936년 9월 장백리의 특별 주선으로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3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중앙육군군관학교는 1924년 1월 광주에 설립된 황포군관학교(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 후신이다. 황포군관학교는 1927년 북벌이 진행되면서 1928년 3월 남경에 중앙육군군관학교가 설립되면서 흡수되었다. 한인들도 황포군관학교 본교에서 1925년 7월 3기부터 22기까지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졸업 후 중국군에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민족협동전선운동에 참여하거나, 공산주의운동 및 아나키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인들이 다시 중앙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윤봉길 의거 이후이다. 1933년 봄, 김구 등의 노력으로 장개석의 허락을 받아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들이 입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이를 탐지한 이후부터 한인들의 군관학교 입교가 어렵게 되었다. 결국 1935년 10월 국공내전 상황에서 일제와의 국제적 분쟁을 우려한 국민당 정부가 재학 중인 한인들의 퇴직 명령을 내리면서 한인들의 입교는 중단되었다.
이렇듯 한인들의 입교가 봉쇄된 이후에 이경채가 중앙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 뒤 일본군이 중국 내륙으로 점차 침략해 들어오면서 중국·일본 관계는 악화되었다. 마침내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가 남경에서 사천성의 동량(銅梁)으로 옮겨가는 도중에 7월 7일 일본군이 조작한 노구교사건에 의해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곧바로 장개석 군사위원장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를 소집하였고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최일선에 해당되는 동부 중국에 5개 전구를 구성하였다. 이에 이경채가 속한 진성 장군의 상해방면군 적총사령부(敵總司令部)(제15집단군)는 제3전구(사령관 풍옥상)에 편제되어 남경·상해·강소성·절강성을 관할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상해에 상륙하여 공격을 시작하면서 전쟁은 화북지역에서 화남지역으로 확대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