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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

방정환이 번역한 『사회주의 학설 대요』가 연재된 ≪개벽≫ 잡지(1923년 12월호)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

방정환이 번역한 『사회주의 학설 대요』가 연재된 ≪개벽≫ 잡지(1923년 12월호)

1928년 4월경 이경채는 송정리 보통학교 사무실에 있는 등사판·원지(原紙)·줄판·인주 등을 몰래 빼내와 박병하와 더불어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하였다. 문서에는 동등한 인간으로 계급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천황은 신성(神聖)으로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말”이라고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하였다. 일본의 대정 데모크라시 당시에도 천황제 비판에는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경죄로 엄하게 처벌 받던 때였다. 또한, 그는 일제의 횡포도 무산계급의 신 사회를 건설하면 파괴된다며 이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에 들어서 그의 민족주의가 좀 더 구체화되었다.

이경채는 인쇄한 수십 장의 문서를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이나 송정리 신사 등의 전신주와 판자벽에 붙였다. 그뿐 아니라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에도 발송하였다. 이는 광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주 지역에 여러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른바 ‘불온 문서’가 시내에 뿌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지만 단서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였다. 이경채 등이 문서를 인쇄한 등사판이나 남은 문서들을 모두 불태워 없앤 뒤였다. 송정리 경찰관 주재소는 광주경찰서와 연합하여 송정청년회 간부들의 집을 수색하는가 하면 광주 사회운동가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압송하였다. 또한 광주경찰서는 형사대를 총출동시켜 광주소년동맹위원 김판암·김만년과 광주고보 김재천 등을 연행하였다. 일제 경찰은 이들에 갖은 협박과 고문을 가하여 취조한 뒤에 한길상(韓吉祥)·장순기(張順基)·국채진(鞠埰鎭)·지창수(池昌洙)·강해석(姜海錫)·장석천(張錫天)·이상근(李湘根)·양영일(梁永日)·조칠성(曹七星)·박승남(朴承南)·이성태(李成泰)·박병하 등 12명을 출판법 위반죄로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그 뒤 1928년 5월경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은 장석천·장순기·국채진·이상근·양영일·이성태 등은 석방하고 나머지 6명은 예심에 넘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병하만 피체되었고 일제 경찰은 이경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경채는 윤해병과 함께 피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