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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경채 광주학생운동에 불을 붙이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독립운동가,이경채
광주학생운동에 불을 붙이다
[ 李景采 ]

출생 - 사망,1910.4.6. ~ 1978.3.25.
광주고보에 진학한 열다섯 살 소년

이경채(1910.4.6.~1978.3.25.)는 1910년 4월 전남 광산군 송정리에서 이성륜(李成倫)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선생의 가정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선생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다 11살인 1920년 4월에 송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입학이 늦은 것은 신학문을 꺼린 부친의 영향도 있었지만, 송정공립보통학교가 그해에 설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3개 면마다 보통학교 하나씩을 설립한다는 ‘3면 1교’ 정책을 표방하면서 설립되었다. 한국인들의 학교 설립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경채는 1923년 4학년에서 6학년으로 월반한 뒤에 1924년 졸업하고 광주고보에 진학하였다. 광주고보는 1920년 5월 광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1922년 관립으로 전환되었다. 그가 입학할 당시에는 1백 명 모집에 3백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다. 고등보통학교가 부족한 데다 어느 때보다 향학열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 뒤 1925년부터는 광주고보는 도지방비를 보조받는 공립으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광주에는 광주농업학교(1910), 전남도립사범학교(1923), 광주여고보(1923) 등의 중등학교와 일본인 광주중학교(1923)가 있었다. 이렇듯 한국인·일본인 중등교육기관이 같은 지역에 존재한 경우는 광주를 비롯하여 서울·대구·부산·평양·신의주 등 6곳뿐이었다. 때문에 1920년대 광주에서는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사소한 충돌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인 교사가 대다수인 식민교육과 민족적 차별, 비교육적 처사 등에 학생들은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집단적인 등교 거부 투쟁인 동맹휴학을 통해 불만을 표출하였다. 때론 학교들 간의 연대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