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4 #풍경4 김장환 목사가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교회에는 늘 주방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하루 한 번씩, 빠짐없이 깨끗하게 청소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오다가다 칭찬을 했습니다. “아니, 어디서 저렇게 부지런한 외국인 청소부를 구했을까?” 알고 보니 그 청소부는 다름 아닌 김장환 목사의 사모 트루디 여사였습니다. 1978년에는 교회 부설로 중앙기독유치원을 세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장애 아동이 다닐 유치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장애아동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함께 생활하다 보면 장애가 없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많이 배우게 마련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익히게 됩니다.” 실제 트루디 여사는 유치원에서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의 통합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트루디 여사는 은퇴할 때까지, 40년간 자신의 월급 통장을 유치원 직원에게 맡겼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월급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유치원에는 늘 돈이 부족했고, 자신의 몫만 챙길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녀는 휴대폰도 없고, 신용카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조선 영의정 류성룡柳成龍(3) 전란이 끝나갈 무렵인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과 일본이 합세해서 명나라를 치러 온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무고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무게감 있는 대신이 가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했고 선조 또한 원해서 류성룡에게 이를 해명하러 갔다 오라고 부탁했지만 류성룡은 노모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런데 북인이 남인의 영수였던 류성룡을 이 일을 빌미삼아 탄핵을 하였고 결국 삭탈 관직되어 낙향했다. 이후 1600년 복직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저술에 힘썼는데 쓰여진 저작 중 하나가 바로 《징비록》이다.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태와 참상 및 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조용히 살다가 1604년 은거하던 안동 하회마을이 수해를 입는 바람에 하회마을에서 풍산 서미동으로 옮겨 살았고 1607년 5월 6일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의 문집 《서애집》의 '서애 선생 연보'에는 말년에 "조용히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손님들을 물리치며 살았다고 하며 류성룡이 임종하는 모습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3 #풍경3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트루디 여사와 마주 앉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올해 84세입니다. 트루디 여사는 김장환 목사와 결혼하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한국에 막 도착한 뒤 시댁에서 처음으로 잔치국수를 먹다가 그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작은 생선 한 마리가 육수 위를 헤엄치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그런 음식을 난생처음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육수를 내기 위한 마른 멸치였습니다. 기겁한 그녀는 결국 국수를 입도 대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둘이었을까요. 그런데도 그녀는 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을까요. 트루디 여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 이게 저의 기도이자 믿음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겟세마네에서 올린 예수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따집니다. 내가 심어지고 싶은 곳이 있고, 꽃 피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길 열망하고, 그곳이 아니라면 강하게 거부합니다. 심겨지고 싶은 곳에서 꽃 피고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조선 영의정 류성룡柳成龍(2) 그러나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조선군은 무너져 선조가 몽진을 가야할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때 전란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간관들의 탄핵으로 인해 잠시 이산해와 함께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고 이때 비변사의 도제조이면서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이자 도체찰사가 되어(오늘날 국무총리 겸 총사령관) 조선의 내정과 군사를 모두 총괄했으며 조선 후기의 군영으로 유명한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도 바로 그였고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원만히 상대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외 화포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했으며 새로 설치된 훈련도감의 관리역으로 임명되어 병법서를 강의하는 등 군비 확충에도 많은 일을 했다. 전시에 행해진 류성룡의 조치들은 유연하고도 실용적이었는데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뜬금없이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하자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을 막으려고 위구르와 티베트에 원병을 청했다가 난리가 났듯 이걸 받아들이면 훗날의 우환이 될 수 있으니 거절하는 게 좋겠다. 다만 여진족으로서는 예전부터 우리에 대한 원한이 크므로 단호히 물리쳐 괜히 자극할 게 아니라 '도와준다는 것은 고마운데 지금은 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2 #풍경2 김장환 목사는 한국전쟁 와중에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했습니다. 온갖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했습니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미군 병사 칼 파워스가 ‘단 한 명의 아이라도 구하겠다’고 다짐한 뒤 하우스 보이로 일하던 똘똘한 아이에게 미국으로 가는 배표와 함께 유학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칼 파워스 상사는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탄광촌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 출신이면서도 자신의 재산을 털어 김장환을 후원했습니다. 어린 김장환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밥 존스 고등학교와 신학대, 신학대학원을 모두 마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 김장환을 만난 트루디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고, 남편을 따라서 머나먼 이국땅 한국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1959년, 미국인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국인의 눈에는 큰 구경거리였던 시대에 말입니다. 그러니 트루디 여사가 한국 땅에서 헤쳐온 60년 넘는 세월은 절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출처:백성호 종교전문기자/중앙일보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조선 영의정 류성룡柳成龍(1)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 | Ryu Seongryong 출생 1542년 11월 7일 (음력 중종 37년 10월 1일) 조선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2] 사망,1607년 5월 31일 오전 7시~9시 사이(향년 64년 6개월 24일 / 23,581일) (음력 선조 40년 5월 6일 진시, 향년 66세) 조선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 서미동 초당 정침(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2리 1. 개요, 조선의 문신, 외교관, 학자. 2. 생애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안동 김씨(安東 金氏)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딸 김소강(金小姜)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그 후 안동에서 지내다가 20대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갔다.어린 시절 한양으로 올라와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때 충무공 이순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이 있다. 1564년 명종 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했고 1566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여러 내직을 거쳤으며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중용되어 그럭저럭 순탄한 관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훌륭한 아들들 키운 숭고한 삶 “여자라고 성인 못 되나” 친정·시집 둘 다 일으킨 수퍼맘 장계향 장계향의 아들 현일은 학문이 완숙해진 52세에 학행으로 출사하여 영남 사림의 종장이자 산림정치가로 크게 이름을 떨친다. 아들 휘일은 아우 현일과 합작으로 『홍범연의』를 저술하는데, 여기에는 국가 재건을 염두에 둔 경세철학이 담겼다. 다른 아들들도 학문으로 각자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가문의 명운을 걸고 절차탁마한 긴 시간의 결과물이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이함과 이시명, 그리고 휘일·현일 형제, 3대가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불천위(不遷位)의 영예를 받기에 이르렀다. 85세 나이로 이시명이 운명하자 아들들이 모두 모여 여묘살이를 한다. 이때 이현일은 『논어』를 강론하고, 어머니 장계향은 『논어』의 실천과 일상화의 중요성을 말한다.(‘석계연보’) 장계향은 자신을 모시려는 소생 아들들의 청을 거절하고, 장남 상일에게 남은 생을 의탁한다. 추위를 막느라 업어서 등교시킨 60년 전의 그 아들이다. 전 생애를 오롯이 경(敬·수양과 실천)의 정신으로 일관한 장계향의 삶은 숭고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한국 음식문화사의 새 장 열어 “여자라고 성인 못 되나” 친정·시집 둘 다 일으킨 수퍼맘 장계향 특히 장계향은 이 기간에 지역의 약초나 토산물을 활용하여 기근과 궁핍, 질병을 해결하였다. 또 건강의 바탕을 음식으로 보고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를 모아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다. 무남독녀 장계향은 어머니의 타계로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게 달려가는데, 영해에서 안동 친정까지는 200리 길이다. 20대 중반 나이에 수십 명을 건사하는 주부였지만 시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배려로 친정살이하며 아버지 경당을 봉양한다. 장계향은 아버지의 재혼을 성사시킨 후 시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0여년 후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린 이복동생들을 자기 곁으로 데려와 돌보며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다.(출처:중앙일보)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강학 열어 자식들 미래 준비하자” “여자라고 성인 못 되나” 친정·시집 둘 다 일으킨 수퍼맘 장계향 당시 이시명은 임금이 청나라에 굴복한 사건에다 지역인의 모함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서울로 압송되는 모욕을 당한 사건이 겹치면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불신에 차 있었다. 실의에 빠진 남편에게 힘을 실을 겸 장씨는 “강학을 열어 자식들의 미래를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부부는 분재(分財·가족이나 친척에 나눠준 재산)로 받은 영해의 넉넉한 들녘에 안주하지 않고 자녀들을 데리고 산골 마을 석보(石保)로 들어가 최소한의 토지를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삶을 모색한다. 훗날 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수비에서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은둔할 목적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곳 수비에 와서 띠풀을 엮어서 집을 짓고 물을 퍼 올려 채마밭을 일구었다. 여기서도 가족 강학은 계속되었다.”(‘갈암기·葛庵記’) 쉽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이 삶의 자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친정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소싯적의 장계향은 성인(聖人)을 꿈꾸었다. 그녀는 “성인도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서유구는 숙종·영조·정조 대 저명한 관료가 많이 배출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후예로, 이조판서를 지낸 서호수(徐浩修, 1736-1799)와 한산(韓山) 이씨(1736-1813)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764, 영조 40). 중시조는 선조대의 명신 약봉藥峰 서성(徐渻, 1558-1631)으로, 약산춘이라는 명주가 이때에 전해졌다고 풍석은 전한다. 약주藥酒라는 말이 그에게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서성의 넷째 아들 서경주(徐景霌, 1579-1643)는 선조의 부마였다. 이로부터 2대 아래는, 풍석의 고조 서문유(徐文裕, 1651-1707)로 예조판서를, 증조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조부는 규장각 설립을 주도한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다. 서유구는 어려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정조 대의 중요한 학자 관료였다. 주역 등 역학에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천문·지리·농업·언어 등 다양한 방면에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는 총 60책으로 정조(正祖, 1752-1800)로부터 “조선 400년 동안에 이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