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인증건강신문 나종민 기자 |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이다. 납치한 항공기를 건물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자살테러를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이 공격받았으며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이 목표로 노려졌고 3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로인해 이 사건은 역사상 최악의 항공사고로 기록되었다.[13] 배후 세력을 추척하는 수사작전명이 공격받은 이들 시설을 딴 Penttbom(펜트밤)이다. 펜타곤(Pen), 쌍둥이 빌딩(tt), 그리고 폭발(bom)을 합친 단어이다. 이 사건은 피해 당사국인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14] 피해 당사자인 미국 내부에서는 해당 사태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대한 무제한의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커졌고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은 무려 90%에 육박하게 되었다.[15]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테러리즘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전쟁에 준하는 수준의 안보 위협이 될 수
주튀르키예한국문화원(원장 박기홍, 이하 문화원)은 지난 10일(현지 시각)에 12명의 본선 진출자와 100여 명의 관객이 참가한 가운데 한국문화원 야외공연장에서 제12회 한식경연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고 밝혔다. 한국 고유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고추장과 된장을 활용한 한식을 주제로 펼쳐진 이날 경연에서 12명의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요리하며 긴장감 넘치는 경연을 펼쳤다. 된장찌개, 고추장 불고기, 치즈 불닭,김밥, 만두 등 참가자들이 만든 음식에 대해 심사위원들 앞에서 설명하는 시간을 통해 한식에 대한 지식과 열정을 뽐냈다. 현지 유명 인플루언서인 '데이비드 균듀즈'가 사회자로 참여한 이번 한식경연대회는 유튜브 생방송을 통해서 한식에 관심 있는 현지인들에게 방송됐다. 경연이 마무리되고 수상자를 발표하는 순간에는 경연장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수상자를 발표할 때마다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박기홍 문화원장이 1등 수상자의 이름을 부르자 1등을 수상한 '야세민 토프락(Yasemin Toprek)'은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1등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다. 이날 경연에서 1등을 수상한 야세민 토프락은 "이번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키신저 생일… 아들이 WP에 기고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미·중 수교와 베트남전 종전 등 1970년대 세계 안보 지형을 바꿔놓은 격변 당시 미국 외교를 진두지휘했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27일로 100세 생일을 맞았다.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등 그가 현직에서 보좌했던 대통령 2명뿐 아니라 후임 국무장관 14명 중 8명이 이미 고인이 됐지만,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강연·저술·인터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두 권의 책을 쓴 뒤 최근 세 번째 저서 작업에 들어갔다. 지난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빌더버그 국제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키신저 전 장관은 100세 기념행사를 위해 뉴욕, 런던과 고향인 독일 퓌르트를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아들이 소개한 키신저 전 장관의 일상생활은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식단은 돼지고기로 만든 독일 소시지 브라트루르스트, 오스트리아의 송아지 고기 커틀릿 요리인 비너 슈니첼 등 고열량 음식들로 채워졌다.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직업적 특성을 감안하면 정신적 스트레스에 상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100세가 되도록 지속적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진짜 무서운 건 원폭 이후의 사회” 그는 “진짜 무서운 건 원폭 이후의 사회였다”고 했다. “피폭자는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았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화상 입은 아이들하곤 친구들이 안 놀아줬어요. 부모들이 ‘피폭도 전염병처럼 옮는다’고 생각해서였죠.” 장훈은 프로야구 선수를 은퇴하고 60살 넘을 때까지도 피폭자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사람 타는 냄새’를 떠올리는 게 무서워, 피폭 기억이 날 것 같으면 배트를 휘둘렀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일본 방송을 보다가 젊은 친구들이 ‘원폭 떨어진 지점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분노했다. 2006년 8월 15일 일본 패전일에 일본의 한 방송에 출연해 “우리 세대는 전쟁을, 그리고 원폭 체험을 후대에 남겨놔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루에 한 끼는 물로 채웠던 시절, 장훈은 큰형인 세치씨 덕분에 오사카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야간 택시 기사로 월 3만3000엔을 벌면서 1만엔을 동생에게 매달 보냈다. 온 가족의 희망으로 오사카의 나니와상고 4번 타자로 섰다. 장훈은 “한국은 세상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77년 1월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장훈(오른쪽)이 어머니 박순분 여사와 함께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 장훈은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야구밖에 모르는 사고력을 넓혀, 모국의 프로야구 설립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 여사는 “아들이 뛰는 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조선일보 DB 1977년 1월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장훈(오른쪽)이 어머니 박순분 여사와 함께 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찍은 사진. 장훈은 당시 인터뷰에서 “일본의 야구밖에 모르는 사고력을 넓혀, 모국의 프로야구 설립에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 여사는 “아들이 뛰는 장한 모습을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조선일보 DB 그날 그의 가족도 모두 살아남지는 못했다. 장훈은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피부가 하얗고 키가 큰 6학년 누나가 그날 죽었다”고 했다. “원폭이 투하됐을 때 큰누이는 수십 명과 함께 학교에서 쓰러졌고 어머니는 열기에 녹아 얼굴도 못 알아보는 아이들 틈새에서 명찰로 딸을 찾았습니다. 누이는 언제나 하얀 얼굴이어서 같이 길을 걸으면 남들이 ‘예쁘다’고 했었는데…. 그 얼굴이 짓물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장훈 “내 조국이니 말할수 있다...日에 사과하라, 돈내라 언제까지 할건가” 히로시마 생존 피폭자인 ‘일본 야구의 전설’ 장훈 인터뷰 도쿄=성호철 특파원 “무더운 여름 날씨였던 1945년 8월 6일, 당시 다섯 살이었던 저는 친구들과 밖에 놀러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번쩍, 쿵’ 했습니다. 정신을 되찾았을 땐 어머니가 저를 꽉 껴안고 있었습니다. 유리 파편에 찔린 어머니의 치마저고리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10일 재일 동포 2세인 전직 프로야구 선수 장훈(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83)은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여러 차례 울먹였다. 여든이 넘어서도 78년 전 기억이 생생한 듯했다. 그는 “그날 피란해서 마을의 밭에 갔는데 심한 화상에 살이 탄 사람들 천지였다. 심한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장씨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23년 동안 안타 3085개, 홈런 504개를 친 스타 선수다.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지만 한국 국적자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폭에서 살아남은 피폭자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2020년 10월 27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평화의광장에서 열린 '제5회 장진호 전투영웅 추모 행사' 참석자들이 6·25 전쟁 전사자 명비에 헌화하는 모습. /김지호 기자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장진호 철수, 한반도 적화(赤化) 막았다 12월 11일, 미 해병대 1사단은 마침내 함흥에 도착했습니다. 11월 27일부터 이날까지 보름 동안 장진호와 개마고원 일대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장진호 전투'라고 합니다. 이 전투만 놓고 본다면 중공군의 포위 공격에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진주만 공습 이후 최악의 패전'이라는 평가가 나왔죠.하지만 중국 입장에서 이것을 일방적인 승리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피해 규모는 중공군 쪽이 훨씬 컸습니다. 유엔군 사상자가 1만7000여 명인 데 비해 중공군 사상자는 공식적으로 4만8000여 명이고, 비공식 수치는 6만명이 넘습니다.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 해병대 1사단이 보름 동안 사투를 벌이는 동안 다른 부대가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까지 진출한 국군 부대도 함흥으로 퇴각했고요.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군인과 피란민 20만여 명은 흥남항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흥남 철수 작전'이라고 합니다.장진호 전투로 큰 피해를 당한 중공군 9병단이 전투 기능을 잃어 몇 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장진호 일대에 고립된 미 해병대 1사단은 궤멸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갈우리 활주로를 통해 동상 환자 등 부상병 4500명을 항공기로 후송했을 때, 미군 지휘부는 "장비를 모두 버리고 항공기로 철수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올리버 스미스(1893~1977) 사단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런 불명예는 없다"고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철수한다면 2개 대대 병력이 마지막 항공기 이륙까지 활주로에 남아야 하는데 그럴 순 없다는 뜻이었죠. 스미스 사단장은 110㎞나 떨어진 함흥까지 사단 병력 전체가 걸어서 이동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후퇴인가'라는 종군기자의 질문에 스미스는 "아니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험난한 지형과 추위를 뚫고 적과 전투를 벌여가며 부대 단위와 장비를 유지하고 후퇴한다는 것은 극한의 사투와 같았습니다. 이때 미 해병대가 죽을 힘을 다해 넘었던 고개가 진흥왕 순수비로 유명한 황초령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대규모 추가 병력을 투입하고 다리를 폭파하며 퇴로를 막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도 추위로 인해 적잖은 타격을 입었죠. 미군의 사격을 피해 눈 위에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혹한과 적군을 뚫고 110㎞ 강행군11월 27일, 미 해병대 1사단은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에 포위됐습니다. 이곳 유엔군 병력은 최대 3만명으로, 중공군의 4분의 1 수준이었죠(자료에 따라 10분의 1까지 보기도 합니다). 게다가 미군에게 중공군 못지않은 큰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바로 추위입니다. 10월이면 눈이 내리는 해발 1000~2000m 개마고원은 중강진과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입니다. 밤이면 영하 30도, 낮에도 영하 20도까지 내려가 윤활유와 대포가 얼어붙고 배터리가 방전돼 통신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중공군의 기습 공격에 전사자가 늘어났지만,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팔 수 없어 주검을 서너겹 쌓아 올려야 했습니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이렇게 지독한 수준의 혹한기(몹시 추운 시기) 전투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