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榘, 1764~1845) 선생은 1764(영조 40)년 11월 10일 아버지 서호수와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나, 1845(헌종 11)년 향년 82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서유구 선생의 삶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까지 평가 받을 정도로 정점에 달했던 영·정조 시절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순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오직 농업개혁을 통한 생산력 증대와 생활문화의 제도화 표준화를 통한 민생의 개선에 바쳐졌습니다.
서유구 선생은 또한 조부이신 보만재 서명응으로부터 시작되어 부친 서호수로 이어져 온 실용지학의 집대성이라는 가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북학파와의 교류를 통해 체득한 이용후생의 실용정신을 바탕으로 평생에 걸쳐 [임원경제지]라는 동양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을 편찬하여 우리 시대에 남겨놓았습니다.
서유구 선생의 집안은 조선 최대의 명문가였음에도 민생과 실용을 기반으로 하여 생활에서 검박함을 추구하였습니다. 서유구 선생이 소년과 청년 시절 교류하였던 사람들은 탄소 유금,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이덕무 등 훗날 북학파로 알려진 개혁 사상가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정조의 핵심 측근으로 정조와 함께 조선 개혁의 꿈을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른 넷 젊은 나이에 정조에 의해 전라도 순창군수로 임명되면서, 당시 백성의 고단한 현실을 온몸으로 깨닫고 본격적으로 조선 농업 현실을 생산력과 제도의 양 측면에서 혁신시킬 방도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고, 순조 치세 아래에서 김조순 세도정권이 시작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파주 지역으로 들어가 몸소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생활인이자 생산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될 무렵, 17년 간에 걸친 야인 생활을 마치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효명세자의 개혁정책에 힘을 보탭니다. 효명세자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조정은 또 다시 안동김씨와 풍영조씨의 세도정권이 힘을 얻게 되고, 서유구 선생은 이후 전라관찰사, 수원유수 등 지방 관찰사 직을 지내며 규휼과 조세제도의 개혁 등 민생 개선에 힘을 쏟는 한편, 농지 개간과 수리 제도의 개선 등 농업 생산력 증대에 집중합니다.
은퇴한 후 마지막까지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위한 시험농장의 운영, [임원경제지] 편찬, 훗날 개화파로 이어지는 박규수, 김영작 등 젊은 후학들의 지도 등에 혼신의 힘을 쏟다가 이 세상을 떠납니다.
문헌에는 시봉하던 시사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운명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