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허가 제도가 중소기업, 소상공인 다 죽이고 일자리를 없앤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마다, 각종 인증, 허가, 등록, 신고해야 한다. 정말 죽을 노릇이다. 영업허가, 영업등록, 영업신고, 안전, 환경, 보건, 품질, 에너지, 신기술/NeT, 신제품/NeP, 소프트웨어, 서비스/디자인, 단체인증, 조달청등록인증, 이노비즈, 벤처, SQ, KC, 해썹(HACCP), 우수건강기능식품(GMP), GAP, 친환경/유기, 할랄, 비건, 코셔, ISO, FSSC, IATF, 클린사업장, 사회적기업, 유망중소기업 등등 수많은 강제, 법정, 민간, 임의 인증제도 들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선택은 기업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거기다 원료수불부, 생산일지, 판매대장작성, 품목제조보고, 자가품질검사, 유효성평가실험, 건강진단, 위생교육, 실적보고, 자체평가, 영업자 준수사항 등등 쓸데없는 일 하다 세월 다 간다. 일만 열심히 하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건강하며 문화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봉사하며 오래 살 수 있다. 정부/지자체가 규제/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상해 인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이경채가 상해로 망명한 시기는 윤봉길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을 폭살한 다음해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미 그곳을 떠나 절강성 항주에 머물고 있었다. 이경채는 비록 임시정부에 합류하지는 못했지만, 1933년 6월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경 상해지역 한인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초창기에는 사립이었지만 이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공립으로 전환되었고 그 산하단체인 상해교민단에서 운영하였다. 인성학교는 완전한 시민육성과 신민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글·한국사·한국지리 등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자활 능력을 배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경채가 도착했을 당시의 인성학교는 윤봉길의거로 인해 프랑스 조계 공훈국(公薰局)의 한인 집회 금지로 강제 휴교된 상태였다. 선우혁(鮮于爀) 교장은 상해에 남아 다시금 학교 문을 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우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물로 어느 누구보다도 인성학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경채는 김판수(金判守)로 개명하고 선우혁을 도와 1933년 9월 다시금 학교 문을 열었다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학우회도 해체되면서 한국인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재일본 한인 유학생운동은 각 학교별 한인 유학생동창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2년 1월에 일본 내에서 커다란 사건이 터졌다. 이봉창이 일왕 히로이토(裕仁)가 관병식장(觀兵式場)에서 사쿠라다몽(櫻田門) 밖의 경시청 청사 앞을 지날 때 수류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일본의 심장인 도쿄에서 일제의 상징이며 최고 통수권자인 왕을, 경비선을 뚫고 저격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중국 신문에서는 불행히도 명중하지 못했다며 “불행부중(不幸不中)”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이봉창은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8일 순국했지만, 이경채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봉창 사건 이후 일본인 유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도 이경채는 상해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곤 했다. 이봉창 의거를 통해 이경채는 이전의 사회주의 방식에서 민족주의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이경채는 도쿄 경시청 내선과(內鮮科)에 피체되었다. 포악하기로 이름난 야나세(柳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이경채는 1931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검정고시를 거쳐 그해 4월 와세다대학 전문부(야간) 법률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 출옥 후 광주고보에 재입학하지 못하는 형편에서, 그리고 일제 경찰로부터 늘 감시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서 일본 유학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와세다대학 전문부에 입학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즉시 와세다대학조선유학생동창회가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사건 규명을 요구하고 일제의 식민정책을 규탄하는 등 이에 적극 호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와세다대학은 자유분방하고 특권 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었고 사회주의자들의 요람 같은 곳이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학풍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세다대학을 선호하였다. 이경채는 낮에는 신문배달과 지하철 공사장 인부로 일하며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그는 주경야독하면서도 바쁜 시간을 쪼개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와 활동하던 양태성(梁泰成)·윤창하(尹敞夏)와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펴고 있던 유동후(柳東厚)·문두재(文斗載) 등과 자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노선을 토의하곤 하였다. 양태성은 이경채와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동맹휴학은 1928년 9월 학부형회가 학교 당국에 불복, 타협하여 학교 측의 최후 통첩일에 자제들을 등교시키면서 종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경채의 퇴학 처분으로 일어난 동맹휴학은 학생들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1929년에 들어서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으로 이어져 “교우회 자치,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시, 노예교육에 항쟁, 독서의 자유 획득, 학원 내 경찰 투입과 간섭 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들이 살포되었다. 이는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명백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으로 폭발하였다. 한편, 이경채 등은 무려 50여 일 동안 예심 중에 있다가 1928년 7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재판에서 강해석·한길상·지창수·조칠성·박승남 등은 면소되었지만, 이경채·박병하·윤해병은 기소되었다. 이경채는 그해 10월 열린 광주지방법원 공판에서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 1년 6월, 박병하는 징역 1년, 윤해병은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이경채는 개성소년형무소에 투옥되어 1929년 10월 20일 출옥하였다. 이경채가 출옥한 지 10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학생들이 교장의 사퇴까지 거론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강경한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동맹휴학 주동자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학교장은 ‘교기(校紀)를 정정(正定)’하기 위해 단호한 처분을 내린 것이라 강변했지만, 퇴학생 보호자들은 학교 측의 호출에 불응하며 맞섰다. 이어 광주고보 동맹휴학은 광주농업학교로 번져갔고 학부형·동창회 및 재동경 광주고보 졸업생까지 포함한 맹휴 중앙본부가 발족되었다. 이는 동맹휴교가 학교 내부 및 광주 지방의 차별 교육 문제에서 벗어나 식민지 교육 체제와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항쟁으로 성격이 변화, 발전한 것이다.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들에게 통고문을 발송하여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며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는가 하면, 학생들에게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여 결속을 다졌으며 학교장에게는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더욱이 맹휴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경찰 취조 시의 답변 요령까지 열거된 실행 요목을 배포하기도 했다. 그들이 작성한 격문은 단순한 교육 현실에 대한 항변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 전체가 일제의 압제 하에 고통 받고 있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불온 문서’와 관련하여 이경채가 피체되자 학교 측은 취조가 끝나기도 전에 권고 퇴학을 시켰다. 이런 부당한 결정에 광주고보 4·5학년 학생 대표 11명은 학교 측에 이경채의 퇴학 이유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한편, 마침 학교에서 열리고 있던 학부형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에는 이경채의 퇴학 철회를 비롯하여 물리・화학 교실 신축 문제, 학교 경비의 투명한 집행 등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학부형회는 사건을 관망하는 입장에서 이경채가 무죄 방면 후에 복교 조치하라는 항의서를 학교 측에 제출하기로 결의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문제는 학교 측이 진정서를 제출한 학생대표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2~5학년 300여 명은 학교 측의 황당한 처사에 분개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교장에게 이경채의 무죄 방면 시 복교를 주장하는 한편 교우회의 자치 활동 보장, 교장의 기만적 행동 반성, 무자격 선생 사직, 일본인 교사의 양심적 반성 촉구, 무도장 신설,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현, 11명의 근신 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였다. 이경채의 퇴학 조치가 교내 문제로, 식민지 교육 비판 등으로 확산되어 나간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 방정환이 번역한 『사회주의 학설 대요』가 연재된 ≪개벽≫ 잡지(1923년 12월호) 1928년 4월경 이경채는 송정리 보통학교 사무실에 있는 등사판·원지(原紙)·줄판·인주 등을 몰래 빼내와 박병하와 더불어 문서 수십 장을 인쇄하였다. 문서에는 동등한 인간으로 계급이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천황은 신성(神聖)으로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말”이라고 일제의 천황제를 비판하였다. 일본의 대정 데모크라시 당시에도 천황제 비판에는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경죄로 엄하게 처벌 받던 때였다. 또한, 그는 일제의 횡포도 무산계급의 신 사회를 건설하면 파괴된다며 이를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에 들어서 그의 민족주의가 좀 더 구체화되었다. 이경채는 인쇄한 수십 장의 문서를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이나 송정리 신사 등의 전신주와 판자벽에 붙였다. 그뿐 아니라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에도 발송하였다. 이는 광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주 지역에 여러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른바 ‘불온 문서’가 시내에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로제타 홀 여사를 아십니까 김태훈 논설위원 지난달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 도중 “19세기 말 한국에 온 미국의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며 구한말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2대에 걸쳐 의료 봉사 활동을 했던 로제타 홀 여사를 언급했다. 윤 대통령 연설에서 함께 언급된 언드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과 달리 로제타 홀은 생소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25세 젊은 미국인 여의사 로제타가 1890년 제물포항에 발을 디딜 때 어렵고 힘든 삶을 각오하긴 했다. 그러나 가혹한 시련이 될 줄은 몰랐다. 1894년 11월, 청일전쟁 격전지였던 평양에 의료봉사 하러 갔다가 남편 윌리엄 홀을 감염병으로 떠나보냈다. 결혼한 지 3년도 안 됐고 아들은 이제 돌인데 배 속엔 둘째가 자라고 있었다.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 잠시 귀국해서 낳은 둘째는 딸이었다. 그 딸마저 이질로 잃었다. 남편과 딸을 한국 땅에 묻었다. ▶이후 로제타 여사의 삶은 개인의 불행을 봉사로 승화하는 과정이었다. 교회사 연구가인 박정희의 저서 ‘닥터 로제타 홀’엔 역경 속에 인류애를 꽃피운 그녀의 삶이 기록돼 있다. 로제타는 거듭된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 진정한 "스승" 한 청년이 길을 가다가 낯 익은 어느 노인과 마주쳤다. 청년은 혹시 자기를 기억하는지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청년은 오래 전 노인의 제자였고 노인 덕분에 지금은 교수가 됐다고 말했다. 청년은 학창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시절 자기는 반 친구의 새 시계를 훔쳤고 시계를 잃어버린 학생은 선생님에게 시계를 찾아달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시계를 훔쳐간 학생이 자진해 나와서 용서를 구하길 바랐지만 누구도 자신을 도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모든 학생을 일어나게 하고 절대로 눈을 뜨지 말라고 당부한 후 직접 학생들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렇게 하여 결국 시계를 찾았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시계를 찾았으니 이제 눈을 떠도 좋다." "그 날 선생님은 제가 도둑이라는 걸 친구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저의 자존심을 지켜주셨지요. 그 때 선생님은 어떤 훈계도 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분명히 알 수 있었어요." 노인이 여전히 청년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청년은 노인에게 "이 사건을 기억하시느냐?" 고 되물었다. 그
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1924년 동맹휴학은 일제 식민지 교육 현실에 저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뒤 1928년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1학년이었던 이경채는 식민지 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싹틔우게 되었다. 이경채는 1926년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통해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또한 민족주의 의식을 가진 한국인 교사에게 민족교육을 받아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청년, 사상단체의 각종 강연회 등을 통해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1927년 여름, 이경채는 4학년 재학 당시 동리 친구인 박병하(朴邴夏)・윤해병(尹海炳)과 동교생 양태성(梁泰成)・유병후(柳秉厚)・김무삼(金武三)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독서회는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비밀모임이었다. 이경채는 몇몇 친우들과의 독서회를 통해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