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증건강신문 유영준 기자 |
국내외 불확실성이 커진고 있다
어려울 때 일수록 과거 경영의 귀재라 불리웠던 재계 총수들의 경영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대내외 불확실성과 위기감이 커지는 가운데 ‘도전’과 ‘혁신’으로 요약되는 ‘창업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반도체, 전자, 자동차 등 주력 산업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선 ‘제2의 창업’과 같은 도전이 필요하다
대우실업 설립
1960년 25세로 연세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취득하고 1966년까지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근무했다.
1967년 3월 32세에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과 공동출자해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들었다. 첫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렸고,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1982년 1월에는 (주)대우를 출범시키며 재계 4위에 올랐다.
그는 바둑 3급 공인의 기력을 보유하였고, 1983년 한국기원 2대 총재로도 취임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을 맡았다. 1989년에 펴낸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0년 장남 김선재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출마설이 돌았지만, "새한국당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영입교섭이 들어와도 응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1993년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선포하였다. 1996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었다. 1998년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 성장시켰다
IMF로 인한 대우그룹 해체
1997년 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 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 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 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 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국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